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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버금 Sep 22. 2023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로베르트 비네 감독 | 베르너 크라우스, 콘라드 베이트, 프리드리히 페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 로베르트 비네 감독 | 베르너 크라우스, 콘라드 베이트, 프리드리히 페르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하나

표현주의는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까지 세계를 강타했던 대공황과 세계대전, 실존주의 철학 등의 영향으로 생겨난 예술사조이다. 대규모 실직과 금융시장의 혼란 등으로 인한 삶의 질 하락은 인종차별, 노사갈등을 야기하고 많은 국가들이 전체주의에 빠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one for all, all for one)


세계대전의 중심에 서 있던 독일은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뒤섞여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공포가 증폭되어 있었다. 피폐해진 현실 속에서 불안과 절망을 경험한 이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게 되고, 객관적 묘사만이 진실이라는 기존의 맥락에 반기를 들게 된다. 내면의 그림자와 불안의 실체를 추적하려는 시도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독일 영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은 무성영화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표현주의 영화의 대표작이다. 과장된 조명과 연극무대를 연상시키는 건축학적인 장치, 뚜렷한 명암의 대비, 착란에 휩싸인 인물 등 비틀리고 왜곡되어 있는 시대의 광기를 포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근의 파괴와 굽이 치는 벽, 소실점의 상승은 역동적이고 과장된 배우의 연기와 맞물려 박탈당한 개인의 자유를 되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 둘

이야기는 숲길에 나란히 앉은 두 사내의 곁으로 한 여인이 지나가면서 시작된다.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라고 주장하는 젊은 남자(프란시스)는 약혼녀와 자신이 겪은 어떤 일에 대해 노인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프란시스가 사는 작은 마을에 칼리가리 박사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마을 축제의 일환인 홀스텐월 박람회에 출품하고자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나 출품을 위해 읍사무소를 찾은 그는 까다롭고 냉소적인 서기로부터 모멸을 당한다. 박사는 자신의 계획대로 몽유병자를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데 성공하지만 박람회가 개최되던 그날 밤, 그의 담당 서기는 시체로 발견된다.

close-up 기법과 동일한 Iris-in 기법. 인물의 미세한 표정연기를 포착.

친구 알렌과 박람회를 찾은 프란시스는 칼리가리 박사가 깨운 몽유병자 세자르로부터 알렌의 명이 내일 새벽에 끝난다는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예언에 따라 알렌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프란시스는 이 사건을 꼭 해결해 내겠다는 결심을 하고, 곧 몽유병자의 예언을 떠올린다. 경찰과 함께 칼리가리 박사를 찾은 프란시스는 박사를 추궁하지만,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식으로 인해 그를 놓아주고 만다. 그러나 용의자 역시 자신이 벌인 살인미수 건과 앞선 두 살인사건은 연관이 없다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한편,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제인은 칼리가리 박사를 찾아가 자신의 아버지 올슨 박사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한 박사는 세자르를 깨우고, 세자르를 직접 마주한 제인은 크게 놀라며 그를 피해 도망친다. 그리고 그날 밤, 잠든 제인의 곁으로 괴한이 다가와 그녀를 납치한다.

칼리가리 박사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프란시스는 밤새 그의 밀실을 염탐하고, 별다른 소득 없이 뒤돌아 선다. 날이 밝아 제인의 집을 찾은 그는 그녀가 괴한에게 납치되었다 풀려난 사실을 듣게 된다. 제인은 자신을 납치한 인물로 세자르를 지목하지만, 프란시스는 밤새 자신이 칼리가리 박사의 방을 지켜보았다며 그를 용의 선상에서 제외시킨다. 그러나 제인은 단호하게 세자르가 범인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칼리가리 박사를 찾은 프란시스는 자신이 밤새 지켰던 세자르를 모습이 모형임을 알게 되고, 도망치는 칼리가리 박사를 뒤쫓아 어느 정신병원으로 들어선다. 그는 세 건의 살인사건을 저지른 남자가 정신병원에서 원장직을 맡고 있으며, 몽유병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려다 스스로 칼리가리 박사라는 환상에 빠져 이 같은 살인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 결국 칼리가리 박사는 보호대에 묶인 채 남은 생을 독방에서 보내게 된다.

이야기를 끝낸 프란시스는 노인과 함께 장소를 이동한다. 그곳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정신병원의 풍경과 같다. 로비에 모인 환자들은 프란시스의 이야기 속 인물들로 그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이다. 그는 원장을 향해 칼리가리 박사라며 소리치고, 난동을 부리다 상상 속의 박사처럼 보호대를 착용하는 신세가 된다. 원장인 남자는 이제야 환자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가닥이 섰다는 말을 남기고 막을 내린다.


***셋

내면의 불안과 절망을 표출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연속성을 획득하며, 하나의 담론으로 진화해 왔다. 전쟁과 대립, 죽음의 공포는 인간의 삶을 경계 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극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흔들리는 파도로부터 좌초되지 않기 위해 비언어적인 방식의 공통어를 생성하는데, 우리는 음악과 회화, 그리고 영화에서 이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감시와 처벌, 이념의 눈을 피해 구현한 시대의 어둠은 온전한 형태와 색을 띠고 있지 않지만, 처하여 있는 형편을 거름 삼아 의사를 표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미쳐버린 인물들의 이상한 이야기는 외압에 의해 폭로된 피해의 모양을 갖추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맴도는 실체 없는 환영들은 그들이 여전히 불안정한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뜻한다.


표현주의의 발로는 아무도 모르는 심연 혹은 제지할 수 없는 흐름 앞에 희생당한 개인에게서 출발한다. 상처 입은 영혼은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어 여느 때와 같이 복구를 소망하지만, 균형을 벗어난 이 기괴함은 정상성이라는 보편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태양을 가리는 달의 그림자로부터 멀리 달아나려는 저항의 신호이자 일식(日蝕)의 대열로부터 벗어나려는 발화점이라는 측면을 기인한다면, 경도 높게 뭉쳐 있는 지배의 덩어리를 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지 있지 않을까.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옳은 것.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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