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재스민(2013)

우디 앨런 감독 | 알렉 볼드윈, 케이트 블란쳇, 루이 C.K

by 위버금

블루 재스민(2013) | 우디 앨런 감독 | 알렉 볼드윈, 케이트 블란쳇, 루이 C.K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혼잣말하는 여자 **

이것은 악몽이다. 그녀의 입에서 쉼 없이 쏟아지는 말속에는 달콤했던 어느 시절로 가득 차 있다. 자랑과 과장은 공작새의 깃털처럼 타인의 시선과 동경을 탐닉하고, 반짝였던 과거의 자신에 흠뻑 빠져 황홀에 도취된다. 비록 그것이 일방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는다. 홀로 내뱉는 말을 약물 삼아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거죠?”


낯선 땅에 도착한 그녀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고고한 품새는 현재 서 있는 공간과 묘하게 이질적이고, 위치 좌표를 상실한 시선은 거리의 소음에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몇 번의 불통 끝에 겨우 연락이 닿은 여동생 진저마저 자신의 부재를 알리는 것에 그친다.


우여곡절 끝에 입성한 진저의 집 안은 터져 나갈 듯한 살림살이와 비좁은 방,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가구들로 가득하다.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선 이곳이 앞으로 그녀의 생활이 이루어질 곳이다. 암담한 현실을 목격한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인지를 바꾼다. 할이 자신과 함께 살기 위해 보여주었던 집을 구경하던 그날로 돌아간다. 뉴욕 한복판, 5번가의 센트럴 파크가 보였던 그때로 회기 한다.


할과 같은 남자는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부와 명예, 자존감을 가져다주었다. 직업을 가져본 적도 주체적인 삶을 꾸려본 적도 없는 그녀였지만, 할은 이 모든 영광을 자신의 품에 안겨주었다. 반짝이는 보석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사교모임에 참석하는 것, 여유로운 한낮에 커피를 마시며 온갖 가십을 즐기는 것, 운동으로 자신의 몸매를 가꾸는 것, 백화점에 들러 신용카드를 긁는 것 등등. 그녀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일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화려하던 일상의 행복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녀는 사라진 영광을 지속적으로 곱씹는다.


여동생 진저와 재회한 재스민은 집에 대한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녀는 현재 집세를 내지 못해 여동생의 집에 얹혀살아야 하는 형편이므로,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마구 쏟아낸다. 더불어 빈털터리가 된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신세를 한탄한다. 그러나 그녀가 타고 온 1등석 비행기와 루이뷔통 가방은 진저에게 되려 당황스러움을 안겨준다. 명품으로 도배된 스스로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언니의 허영이 여전하다는 사실까지도.


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상대를 가리지도 않는다. 들어주는 상대가 없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행동은 불편함을 도외시하는 그녀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눈앞에 처한 갈등이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황의 초라함에서 자신을 도피시키기에 급급하다. 그녀의 일생은 늘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타인에게 떠넘긴 채, 자신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간편하고도 속 편한 방식이다.


문제는 이제 그녀의 곁에 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던 할이 사라지자 그녀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돈과 명예, 사회적 체면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아 주는 것은 늘상 복용하는 신경안정제와 과거를 상기시켜 줄 혼잣말뿐이다. 가난하고 예민해진 신경에 급히 때려놓는 포션(potion)만이 지금의 그녀를 살게 한다.


** 플래시백(Flash Back) **

파편화된 그녀의 정신을 대변하듯,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둘로 나뉜 삶의 간극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부유했던 과거, 그로 인해 남게 되는 환상통은 시간 단절을 사이에 두고, 분열을 지속한다.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벌인 남편 할의 사기행각과 이를 외면했던 그녀의 행적은 모든 것이 무너진 현재의 상태와 끝없이 대비된다.


재스민은 그녀의 시선이 닿는 사물과 귀로 들리는 모든 언어에서 과거의 흔적을 반추한다. 이것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행위임과 동시에 여전히 예전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고통이다. 몸이 속해 있는 장소와 희망하는 삶의 차이는 그녀가 현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데 가장 큰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극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트리거(trigger)들로 가득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은 그녀를 과거의 기억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고, 이러한 현상의 재현은 현실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과거로의 회귀는 사건의 인과를 분명하게 밝히고, 그녀의 성격적인 측면을 더욱 강화해 주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상이 된 그녀는 자주 숨이 가쁘다.


“언니는 무시해 버리는 습관이 있으니까.”


모든 상황을 외면하는 그녀의 캐릭터는 할의 사기행각과 외도도 모르는 척해왔다. 남편이 하는 일이었지만, 그녀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 양 방관한다. 할의 그늘에서 누리는 부유한 삶이 행복했던 그녀는 바람을 의심하는 여동생의 충고를 듣고도, 사업상의 만남이라며 합리화해버린다. 정확한 정황을 따지고, 수상함을 전후를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에 할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거짓을 믿고, 그가 안겨주는 물질적 혜택에 자신을 내맡기는 안락을 택한다.


이런 외면은 과정이라는 번거로움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탕진한 상황에서도 학교로 돌아가거나 ‘큰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녀가 말하는 큰일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저 남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무언가. 구체적이지 않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 어떤 것임 것만을 확신한다. 실내 인테리어를 배우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진저는 컴퓨터 수업에 드는 비용과 시간, 노력 등 경로의 복잡함과 고단함을 언급하지만, 재스민의 마음은 이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있다.


”적어도 난 남의 돈은 안 훔쳐. 난 범죄자가 아니야! “


여동생 진저의 약혼자 칠리는 갑작스레 나타난 재스민으로 인해 자신의 결혼이 미루어진 것에 불만을 표한다. 마초적이지만, 현실적인 이 인물은 재스민과 전혀 다른 성격으로 사사건건 그녀와 부딪힌다. 칠리와 친구들의 대화는 사실과 객관이라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친구 에디와 재스민을 엮거나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선하여, 진저로부터 독립하기를 바란다.


또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는 그녀의 몽상을 정신병 정도로 취급한다. 물론 이것이 재스민의 방어기제임을 그 또한 알고 있지만, 대책 없는 재스민의 미래로 인해 진저와의 결혼을 더 지연시킬 마음은 없다. 그 또한 자신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칠리에게 있어 현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일이 끝난 뒤에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권투경기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정직하다. 그래서 그는 재스민을 따라 파티에 간 진저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자 불같이 화를 내고, 그녀의 직장에 찾아가 다시 돌아오라고 매달리는 등 인간적이지만, 감정에 솔직한 면모를 보인다.


그는 다른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 속에 살며, 내 수중의 돈만이 내 것이라 믿는 인물이다. 타인의 돈과 명예에 관심이 없으며, 무언가를 재고 따지는 등의 계산을 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꽤 순애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다소 흥분하는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진저에게만큼은 일관된 사랑을 선사한다. 또한 유부남에게 배신당하고 돌아온 진저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이는 진지함도 엿보인다.


신체와 정신이 일치하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재스민의 휘청거림과 상반된다. 칠리가 단단하게 박혀 있는 바윗돌이라면, 재스민은 언제든 이 자리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민들레 홀씨와 같다. 그녀의 영혼은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낯선 곳을 향해 있다. 하지만 과거에 발목 잡힌 그녀는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흩날리기만 할 뿐이다.


** 파멸의 계속 **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만난 남자, 드와이트가 그 주인공이다. 그에게서 야망을 발견한 재스민은 할의 대체자로 드와이트를 선택한다. 그녀는 그의 환심을 사려, 자신의 직업을 속이고, 자식을 버리고, 전남편의 자살을 숨긴다. 나쁜 의도를 품었다기보다 자신을 포장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거짓을 술술 풀어낸다.


심리적 괴리가 커질수록 거짓도 늘어난다. 가난하고 초라해진 자신을 애써 감추기 위한 장식이 더없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내 것임이 당연했던(그렇다고 믿었던) 넓은 집과 보석, 여가 시간이 사라지고 없는 그녀는 가용할 수 있는 대체제를 찾으라 바쁘다. 그와 어울리는 짝이 되기 위해 그녀가 꾀하는 거짓말은 펼칠 깃털이 없는 공작새처럼 가련하지만,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따라서 불안과 회피, 거짓도 커져간다. 진실이 드러날까 불안에 떨면서도 허상과도 같은 이전의 허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변화하지 않는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편승해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이건 네 남편이 한 짓과 똑같아!”


약혼반지를 맞추어 가는 길에 만난 진저의 전남편 어기는 드와이트와 함께 있는 재스민을 향해 비난 섞인 진실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복권당첨금을 날리게 된 사연과 그녀를 떠난 이복아들 대니의 행방에 대해 낱낱이 밝힌다. 그 역시 할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거금을 날리게 된 피해자 중 하나로 할과 할의 아내인 재스민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드와이트는 재스민에게 결별을 고하고, 재스민은 다시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한다.


재스민은 어기가 알려준 주소를 따라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 대니를 만나러 간다. 대니는 엄마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체포된 아버지로 인해 자신이 누려온 삶의 밑바탕이 사기였음을 깨닫고, 명문대를 자퇴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까지 향하는 따가운 시선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악기점에서 일하는 대니의 삶은 평온하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이 불법적인 요소로 가득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묵인해 왔던 재스민의 이중성을 증오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에 만족한다며, 자신의 삶에서 빠져달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그랬다. 그들은 수법을 동원했을 때 부유했고, 외도를 모른척했을 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타인의 입(프랑스 호텔에서의 연락과 친구의 증언)을 통해 듣게 된 할의 불륜에 관해 재스민이 따져 묻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할이 사랑을 인정하자, 배신감에 휩싸인 재스민은 폭로로 반격한다. 이것이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진 결정적 장면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재스민은 땀에 절어 진저의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행복에 겨워있다. 진저는 칠리와 재결합했고, 대니는 엄마인 재스민을 버렸다. 오로지 자신만, 드와이트와 결별한 상태다. 하지만 그녀는 이 역시 회피한다. 드와이트와 결혼할 것이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진저를 기만한다.


집을 떠나 거리로 나온 재스민은 벤치에 앉아 정신 나간 여자마냥, 또다시 블루문이 흐르던 때를 중얼거린다.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노숙자 마저 그녀를 피한다. 이제 그녀는 정말 혼자다. 더는 갈 곳도, 그녀를 받아줄 곳도 남아있지 않다. 파멸만이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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