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믿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은 오직 종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신을, 누군가는 인간을, 누군가는 가족을 / 애인을 / 정치인을 / 과학을 / 법을 / 돈을 / 이야기를 / 가능성을 믿는다.
나를 거쳐간 믿음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을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 존재의 고유성을 믿고자 한 시기가 길었던 것을 안다.
얼마 전 친구와 나눈 대화를 통해 그 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친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내 취향이 자본주의나 인스타,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졌다. 즐겨 입는 옷이나 좋아하는 음악, 영화가 나만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가보니 자신과 똑 닮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많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고유한 나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왜인지 그런 생각을 맞닥뜨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번 글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아주 적극 대항하기로 한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고유성을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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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학교에서 영화를 다루는 교양 수업을 수강한 적 있다.
매주 한 편의 영화를 다루곤 했는데 수업 전까지 영화를 보고 가야 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영화에 대한 소감을 나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꺼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영화를 본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이야기 다른 화두에 주목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쪽이든 항상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수업시간에 배운 영화적 기법 같은 것들은 모두 잊었는데 또렷이 기억하는 교수님 말씀이 있다. 교수님은 어떤 영화를 보든지 그저 ‘좋다’, ‘싫다’에서 끝나면 안 된다고 강조하곤 하셨다. 내가 왜 이게 좋고 이건 싫은지, 왜 이것을 볼 때 구역질이 나고 왜 이것은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고.
예를 들어, 나는 최근 개봉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를 인상 깊게 봤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아, 좋았다!’하고 금방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엇이고, 그 장면을 볼 때의 감정은 어땠나? 여기 머물러 특별한 감정을 유발한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탐색해 보기로 한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조이의 눈물에서 이해받지 못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문을 걸어 잠궜던 과거의 나를, 에드먼드의 대사에서 잊고 있었던 다정의 힘을 기억해 냈다. 이런 식으로 파고들다 보면 지금의 나를 이루는 무수한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수업 이름이 ‘영화로 사회 읽기’였던 것과 별개로, 나는 영화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
며칠 전 “그냥 열심히 보는 건 연구와 다르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적 있다. 영화가 왜 좋고 나빴는지 고민하는 과정은 열심히 보는 것을 넘어 연구에 가깝다.
첫 번째 ‘왜?’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질문이 줄지어 따라온다. 어떤 생각의 뿌리를 살피다 보면 답이 결코 손쉽게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배운다. 게다가 나 자신에게까지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잘못 건드리는 날에는 다 모른 척하고 그만두고 싶다. 끝없는 중단의 욕구를 참아내며 내 개인의 역사를 살펴야 하는 아주 고된 작업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같은 취향도 다르게 만든다. 우리가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영화를 본다고 해서 차별화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우리는 고유한 과거와 현재를 지난다. 같은 것을 소비하고 즐긴다고 해도 거기 매료되는 이유는 모두 다르다. 《디지털 텍스트와 문화 읽기》를 쓴 김진량 연구자가 책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서사 양식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낸다는 것은 동시대의 보편적 인식체계로 포획되지 않는 인간의 창조를 뜻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선구적 서사물들은 획일화된 통합의 담론을 뒤흔들어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새를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인간 탄생의 징후를 보여주거나 그 결과를 증언해 왔다.” ‘새로운 인물의 창조’는 단지 위대한 문학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삶을 살 때, 고유한 서사가 쌓인다.
분명 우리는 타인의 영향을 받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유행을 따르기도 한다. 오늘날 매체화 시대에 인스타그램,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취향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사실에 크게 낙담하거나 ‘내 개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을 연구하고, 자신의 고유성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부단히 믿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연구가 필연적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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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는 고유한 역사가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고유한 언어와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나도 타인도 분명히 이곳에 있다. 나만의 것이 있고 당신만의 것이 있다. 신기한 건 그 뿌리를 살피다 보면 결국 통하는 데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런 것까지 덩달아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