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9년 전 그날을 기억한다. 체육대회 날이었다. 엄마가 싸준 김밥을 입 안 가득 넣고서 TV에서 흘러나오는 아침 뉴스 소리를 들었다. “배가 가라앉았대.” 곧이어 배에 탄 모두를 구조했다는,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별 일 아니군 하고 얼마간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던 것도.
그렇게 줄다리기와 2인3각 같은 종목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반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배가 가라앉았대.”
아침과는 다른, 기이한 불안이 학교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 누군가 TV 화면을 켰고, 반쯤 잠긴 세월호를 처음으로 봤다.
그날은 집에 돌아와 내내 뉴스를 봤다. 어두운 바닷물과 자꾸 기울기만 하는 배를 지켜봤다. 구조되지 못하고 배에 남은 학생이 자신의 부모와 통화한 내용을 들었다. 거센 파도 소리를 뚫고 울먹이는 목소리와 비명을 들었다.
그 해는 어쩐지 멍한 기억으로, 곳곳을 차지한 노란 리본들만 어지럽게 남아있다.
그게 2014년의 일이다. 리본은 점점 사라졌고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지겹다’고 말했다. 그리고 작년 가을, 이태원 참사가 있었다.
할로윈을 앞둔 10월 29일 저녁 누군가 그룹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있는 모양이라고, 다들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 메시지를 받고 트위터에 접속했고 실시간 트렌드에 ‘이태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영상을 봤다.
사람들 비명 소리, 사방에 쓰러져 있는 몸, 그 위에 겹쳐지듯 앉아 심폐소생술을 하는 몸, 그리고 그것을 찍는 화면 밖의 몸. 어두운 길, 붉은 조명.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뒤덮는 노랫소리. 쿵. 쿵. 쿵. 그 박자에 맞춰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영상을 종료했다. 화면은 꺼졌는데 머릿속에서 그 몸들이, 그 소리들이 자꾸만 반복 재생됐다. 영상을 재생한 그 짧은 찰나가 영원처럼 계속됐다.
그리고 꿈을 꿨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길바닥에 길게,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옆에 앉아 심장을 압박하고 심폐 소생했다. 자꾸 소리 질렀다. 사람들은 잠시 들여다보고 금방 떠났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 다시 몸에 손을 댔을 때 일순간 차가워져 있었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 그 앞에 앉아 한참 기도를 했다.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세요, 하고.
차갑게 식은 얼굴의 주인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릴 때 화들짝 잠에서 깼다.
영상에 이어 꿈의 감각은 너무 강렬해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한동안 그것을 뒤덮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밀지 말라고 외치는, 숨 막힌다며 괴로워하는 장면을 맞닥뜨렸다. 그때 모두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음을 알았다.
이태원 참사가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국가 애도기간은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지속됐다. 수많은 공연, 행사가 취소됐다. 자연스럽게 가수들은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고 배우들은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고 관객은 모일 수 없게 됐다. 그것을 나는 일종의 ‘입막음’으로 느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정부에서 정확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애도기간을 선포함으로써, 사고 책임과 원인 규명은 나중에 해도 되는, 덜 중요한 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진상규명과 책임 문제를 논의하려는 이들을 훈계하고 ‘지금 그럴 때냐’며 비난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거나 다 같이 소리 내어 울거나 분노할 수 없게 되었다. 각자의 방에 조용히 앉아 홀로 슬퍼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느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의 애도를 조각내려는 시도, 결과적으로 한데 모이지 못하도록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애도기간이 끝나고 연극 <클래스>를 보러 갔을 때, 그동안 느낀 외로움과 단절을 단숨에 치유받는 경험을 했다. 연극 시작 전, 아직 조명이 다 꺼지지 않은 어스름한 소극장 안에 참사를 애도하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관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 앉아 함께 귀 기울이는 순간만으로 우리가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게 내가 원했던 애도의 모습임을 깨달았다.
놀라운 우연으로 무대에는 작은 추모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수많은 메모지와 꽃다발이 있다. 극 중에서 배우는 그 앞에 한참을 머무른다. 가만히 인사를 하고 꽃다발을 놓는 순간에 관객이 증인으로 함께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연극을 본 뒤로 우리가 지나온 순간 중에서 어떤 이미지를 건져 올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일은 국가적 트라우마를 낳는다. 물론 사회적 제도나 인식이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뒤집힌 배의 이미지, 물이 배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소리, 비명, 서로 다른 몸이 겹겹이 뭉쳐 있는 모습 같은 것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괴롭다. 자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아픔을 오래 기억하는 증인이 될 방법은 없을까?
나는 도리어 새로운 이미지를 발굴할 것, 그리고 그것을 믿는 마음을 제안한다.
아끼는 이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이태원 참사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별안간 지하철 급출발로 바닥에 쓰러졌다고. 그때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인형 뽑기 하듯 다 같이 들어 올려주었다고. 그 대화 이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장면을 기억한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한다. 누군가 쓰러지고, 모르는 사람들이 따뜻하고 끈끈한 손길로 그를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을. 그런 걸 상상하면 조금은 덜 괴로운 마음으로, 더 오랫동안 기억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끝으로 임솔아의 시 〈서로〉의 일부를 발췌해 옮긴다.
우리 중 누군가가
종일 옷을 지킨 적이 있다 말했다.
옷을 벗어두고 사람들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했다.
납작하게 널브러져
모래 바닥에
나뒹굴던
옷.
우리 중 누군가가
그런 장면은 이상하게도
잊히질 않는다 말했다.
셋 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얼굴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찾아주려는 듯
우리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울 때까지
그랬다.
- 15-17쪽, 《겟패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