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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 Oct 20. 2024

꿈에서 추방당한 이의 읍소

불면증의 서막이 오르기까지 1



꿈이라는 중의적인 단어 앞에서 당당한 어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꿈을 버리고 돈과 안정성을 택한 흔한 직장인이다. 스물여섯을 앞두고 한 해의 일기를 마무리하던 어느 밤, 나는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오르막 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을 실현할 재주가 부족함을 어렴풋이 깨달은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용기를 내기엔 더 이상 가난을 견딜 자신이 없어, 애매한 재능에 삶을 거는 대신 나를 빠르게 일꾼으로 고용하고 월급을 줄 직업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지원서만 낸다고 받아주는 회사는 없다. 요즘 세상에 구직은 진심을 파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나는 개발이 하고 싶다. 더는 예술이 하고 싶지 않다.'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얻은 직장에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두른 익명의 사람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근로계약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세요.' 최면에 걸린 나는 명조체와 고딕체로만 쓰인 세상을 빠르게 읽어나가며 그들 중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속고 속이는 여느 일이 그렇듯,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도 유효기간이 있었다. 드러난 진실 위의 나는 개발이 즐거운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다른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꿈을 등지고 익명의 삶에 몰두하는 동안 꿈이 나를 떠났다. 하지만 꿈을 탓하지 않았다. 내가 꿈 대신 돈을 택해서 꿈도 나를 떠난 것뿐이다.


진실과 진심이 드러난 삶을 견디는 일은 퍽 우울했다. 현실이니까 받아들이기로 했던 회사에서의 수많은 사건이 다시 쓰였고, 사건의 주인공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취업을 준비하며 더 이상 창작의 꿈을 꾸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멍청한 다짐이 삶을 삭막하게 만들었다고 자책했다. 꿈은 다시 꾸면 된다는 쉬운 문장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곧 '술이 술을 마신다'는 노래 가사가 삶이 되었다. 우울해서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술을 먹어서 우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술을 끊으려고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시도는 늘 실패로 돌아갔다. 술을 먹고 싶은 마음을 외면하는 것이 첫 번째 난관이었다. 술을 마시는 일은 어느새 관성이 되어있었는데, 관성을 누르기 위해 그만큼의 정신력이 필요했다. 겨우 버텨낸 뒤에도 술로 회피하고 있던 삶을 다시 맨 정신으로 직시하는 것이 어려웠다. 술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무능력하고, 꿈이 없고, 부당한 일에 제대로 목소리 내지 못한 나약한 내가 있었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매일 같이 술을 마신 나는 결국 병원을 찾았고,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영원히 술을 끊는 '단주'형과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는 '투약'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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