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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 Oct 13. 2024

밤이 되었습니다. 잠에 들어주세요.

불면증의 시작


1. 약을 먹는다.
2. 약효가 돌 때까지 몸을 이완시킨다.
3. 잠'자리'에 든다.


불면증이 생긴 후, 매일 밤 전쟁에 나서며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다. '오늘은 꼭 두 시간 이상 자게 해 주세요', '중간에 깨지 않게 해 주세요' 등 구체적인 소원을 비는 일도 잊지 않았다. 춥거나 덥지 않을 정도로 실내 기온을 조절하고, 까칠한 티셔츠 대신 포근한 잠옷을 갖춰 입었다.


나는 '잠에 드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약을 먹고 한 시간이면 잠들 수 있었다. 불면증의 증상으로 '입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문제는 한 시간 정도면 잠에서 완전히 깨어버리는 것, 즉 '수면 유지'의 어려움이었다. 수면 효율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 대비 실제로 잠이 든 시간을 의미하는데, 나는 수면 유지가 되지 않아 수면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다. 잠에 들었다가도 한 시간이면 눈이 뜨여,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하는 시간에 잠을 자는 대신 '잠들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오늘 하루를 게으르게 보내 체력이 남은 것은 아닌 지 반성하고, 베개의 높낮이나 이불의 두께가 적절한 지 몸을 뒤척이며 고민했다. 잠을 잘 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나'를 모시는 일에 가까웠다. 늘 불편해 보이지만 왜인지 설명해주지 않는 나를 위해 알아서 고민하고 만반의 준비를 할 것. 하지만 그는 순순히 (곯아) 떨어지지 않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원래의 나는 오히려 너무 많이 자는 사람이었다. 학생 시절에는 수업시간 내내 졸고도 이부자리에 누우면 금세 잠들곤 했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퇴근 후 여가나 자기 계발 대신 이른 잠을 청하는 일이 잦았다. 가끔 삶이 바빠 잘 시간이 부족할 때도 잠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은 드물었다.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잘 못 잔다고 하던데, 나는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당당히 '잠'을 꼽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쉽게 든 잠 뒤에는 따스한 꿈이 찾아왔다. 보고 싶었던 이의 얼굴을 비춰주거나, 세상에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던 수많은 꿈. 꿈도 현실을 살다 온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꿈이 나를 추방한 것은 2022년 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은 지 3개월 정도 된 시점이었다. 우울증 치료제 중에는 졸리게 하는 성분이 있는 약이 더러 있다. 내가 먹는 '파란 약'도 그중 하나였는데, 약을 먹게 된 초창기에는 하루 열 시간을 내리 자고도 피곤해했고, 비몽사몽 한 채로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이 삶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도 '이렇게 내내 잠만 잔다면 우울할 새가 없겠군.'이라고 긍정하며 순순히 약을 삼켰다. 그런데 잠으로 우울을 치료해보고자 했던 생각을 조롱하듯 삼 개월 만에 불면이 찾아왔다. 밤마다 한 시간 단위로 자고, 깨는 것을 반복하는 삶이 제멋대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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