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대한 서평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0.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1984년 판 서문에 등장하는 저자의 이야기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는데(“돈을 좇지 말아라, 돈이 너를 좇아오게 해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도 포함해서), 그 원 출처가 이 책의 서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꽤 신기했었다(위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자신의 인생 자기계발책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상관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위의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니다. 프랭클 박사는 베스트셀러를 쓰려고 의도하지도 않았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익명으로 책을 출판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영어판 하나가 250만 부나 팔리고 19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놀라운 기록을 세우게 되었는데, 위 이야기는 의도하지 않았던 베스트셀러의 등극으로부터 프랭클 박사가 얻은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무엇인가? 성공을 목표로 삼지 않아야 한다면,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사실 무언가를 목표한다는 말도 이상하다. 이 책은 피터 드러커의 책처럼 목표달성능력을 강조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은 저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 소재로 한다. 요컨대, 이 책은 ‘살아남는 것’이외에 그 어떤 것도 목표로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니 살아남는 걸 넘어서서 어떻게 그 상황과 과정을 버텨왔는지, 그들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독자에게 진솔하게 전달해준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잔인한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그 누구도 경험하기 힘든 절망스러운 상황을 경험하였다. 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고, 모든 소유를 잃었고, 추위와 굶주림, 가혹행위,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을 견디게 해준 것은 1.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 그리고 2. 위안이 되는 몇몇 순간들(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수용자들끼리 주고받은 농담,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는 것 등)이었다.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는 이러한 상태를,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의 지적에 더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provisional existence)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면 인생의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하며 스스로 퇴행하게 된다. 그 절망적인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지만, 과거의 회상에만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 삶의 의지를 잃게 된다.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중략)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중략)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 더 이상 간섭 받지 않고.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33~134.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이다. 인간의 정신상태와 육체의 면역력은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랭클 박사는 자신의 경험과 수용소 주치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수감자들의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36.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주위에도 극심한 좌절과 무기력을 경험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견디다 못해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마감하기도 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할 용기조차 없어서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과 같이, 좌절과 무기력의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프랭클 박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32, 137.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바로 그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닐까. 살아야 할 이유를 진작에 알았거나 발견했으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조금이나마 가졌을 것이고,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해! 너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봐!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핸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37~138.
프랭클 박사의 해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와 같은 생각이 오히려 무게감을 가중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의하는 지점도,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었다.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면이 어느 정도 강한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의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방안이 있을까?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례나 경험담을 통해 생각해 본 결과, 어떤 것을 생각했을 때 아주 조그마한 미소라도 자아내게 하는 또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힘을 내게 해주는 그 무언가.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될 것 같았다. 프랭클 박사의 경우,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였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78.
또한 프랭클 박사가 수용소에서 상담했던 두 ‘자살미수자’의 경우, 한 사람에게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아이’였고, 다른 사람(과학자)에게 그것은 ‘자신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책’이었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42.
‘아하 그렇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송파구에 사는 세 모녀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전 재산 현금 70만 원을 놓아두고 자살한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은 일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생을 마감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한 것일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결정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이 ‘생활고’였다니 더욱 참담해진다.
‘사랑하는 사람’, ‘의미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세요! 라고 말하기 전에,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의미있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는 일말의 정신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용소에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가 있었고,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주고받는 사이가 있었듯이, 사회와 단절되지 않도록, 이웃들과 단절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물론 그분들에게 사회로 나오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도적으로는 국가나 유관 기관 등에서 복지를 신경써야겠지만,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이웃들이 소외된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 나도 그런 이웃이 되려고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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