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 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에 대한 서평
자본주의는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자신의 존재 기반으로 깔고 앉아 독점으로 높은 이익을 추구하는 무언가의 활동이다. 그러기 위해 기존의 사회질서와 위계, 국가, 문화 등 온갖 영역에 침투하여 무언가의 사회적 구조물을 만들어 그와 결합해 존재하는 실체다.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83
일반적 시장에서의 경쟁은 세 가지(생산자와 생산자 사이의 경쟁, 소비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쟁, 또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쟁) 각도에서 벌어지는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가 길어지면(즉, 생산과 소비 사이에 긴 상거래 망이 형성되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작용하는 경쟁의 힘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상인의 힘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상인은 생산자들과 마주할 때는 그들끼리 경쟁하도록(혹은 단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가격을 후려칠 여지가 생길 수 있고, 소비자들과 마주할 때는 그들끼리 경쟁하도록(혹은 단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게 됩니다.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74~175.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의 현상이며, 소수의 현상이고, 높은 곳의 현상입니다. 자본주의의 특권과 우위는 늘 선택할 유지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독점이 사라졌다고요? 그렇다면 다른 걸 찾으면 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자본주의는 죽었을지 모르지만, 아들과 손자의 자본주의는 계속 이어갑니다.
- 1985년 10월 사토발롱에서 사흘 동안 진행된 ‘주르네 페르낭 브로델’ 세미나에서.
물론 그가 명확한 언어로 정의하지 않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유통’영역의 ‘반시장’, 즉 독점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생산, 유통, 분배, 소비 영역 어디나 들락거리며 독점과 고이윤을 추구하는 것이지, 어느 한 영역이 자본주의 본연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15~18세기의 역사적 시공을 관찰해보니 유통 영역, 그중에서도 상층부의 유통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일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생산 영역에서 큰 이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이 거의 그리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산업혁명 이후 산업의 생산성과 이윤이 자리를 잡아가자 마침내 생산 영역으로 자본주의가 침투하게 되었다는 게 그의 견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87.
북유럽은 고래의 자본주의 중심지였던 지중해 지역이 그들에 앞서 아주 오랫동안 찬란하게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그냥 가져갔을 뿐입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중략) 결론적으로 볼 때, 막스 베버가 오류에 빠지게 된 본질적 이유는 그의 연구 초반에 근대 세계의 촉매제로 자본주의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베버가 중시했던 자본주의의 정신적 속성)가 자본주의 태동의 본질적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자본주의의 숙명적 과제는 사회의 수직적 위계와 부딪히는 문제였습니다.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80~81.
그들은 지중해 지역에 이미 있는 부를 일거에 덮쳐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닥치는 대로 장악했습니다. 즉 값싼 상품을 대량으로 들이밀면서 지중해 지역에 밀려들었습니다. 질이 떨어지는 제품이 많았지만 남유럽의 질 좋은 직물을 고의로 모방하고 두루 평판이 좋은 베네치아 ‘상표’를 붙여서 베네치아의 일상적인 시장에 내다팔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중해 지역의 산업은 고객도 잃고 평판도 잃었습니다. (중략) 간단히 말해, 북유럽 사람들의 승리는 우월한 사업 개념이라든가 자연스러운 산업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북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것과는 더욱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정책은 단지 이전의 승자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폭력이 개입되었던 것도 물론입니다. 이러한 게임의 규칙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요?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04~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