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가 되길 원하든 법이란 것을 알고 싶지도 않든 ‘법’은 연못(우리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 누구에게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 속의 주민들 모두가 법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제대로 된 법을 선택해야 하겠지요. -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 p.12.
1. 문제 제기
2008년에 법대에 진학했을 때만 해도 나는 잘 몰랐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법률행위'를 하고 있었는지.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표현했던 맥락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법은 존재의 집이다."라는 표현도 적절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법은 우리의 존재에 필요한 행위들을 하는 데에 필수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또 의무를 부담한다. 개인뿐만이 아니다. 국가권력은 더더욱 그러하다. 입법, 사법, 행정 모두 법을 중심으로 그리고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법은 해당 국가의 정체성이다."라는 표현도 적절할 것 같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마음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참고 : https://news.joins.com/article/17281314) 표현의 자유가 없으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인 표현활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거래의 자유가 없으면 물건과 서비스를 마음대로 사거나 팔 수 없다. 신체의 자유가 없으면 권력기관이 자의적으로 개개인을 감금, 구속할 수 있다. 평상시에 호흡을 할 땐, 공기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러다 봄철에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요즘은 겨울부터 심해지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다), 비로소 깨끗한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된다. 법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수많은 자유들, 그 상당부분은 지난 수백년간 인류가 싸우고 싸워서 얻어낸 결과물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한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다가 개인의 권리가 중대하게 위협받고 침해당할 때,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던 자유, 우리에게 허락된 권리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정의의 여신, 디케 (https://pixabay.com/ko/)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국민들에게 법의 소중함, 그것도 '정의로운 법'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건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서구사회에서는 '정의' 또는 '법치주의'와 관련한 논쟁을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진행해왔는데,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회계약론(홉스, 로크, 루소), 벤담의 공리주의, 롤스의 정의론 같은 이야기들이 여기서 등장한다. 이 내용들에 대해서는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에서도 매우 친절하게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법치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법치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이 있어야 하고, 법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져야하며, 법에 정해진 공정한 절차에 따라 국가와 사인, 사인과 사인 사이의 분쟁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똑같은 법의 내용을 가지고 A가 해석하는 것과 B가 해석하는 것이 다르면 어떻게 될까? 물론 답은 정해져 있다. 법의 해석권한은 사법부에 속하는 법원에 있다. 특히 헌법에 대해서는 그 해석권한을 헌법재판소가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법의 해석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 해석의 문제
많은 사람들이 '마르틴 루터'의 이름만 알고 지나가는 '종교개혁'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종교개혁하면 가장 많이 연상되는 것은 바로 면죄부이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이 면죄부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면죄부를 통해 내세의 구원을 얻는 것은 진리이자 상식이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중세시대 당시에 '법'의 역할을 했던 '성서'의 해석권한을 가톨릭 지배계층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지배계층은 ‘성서’를 통해 원칙과 질서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였다. 당시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회의 권위는 지금의 국가수반 그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의, 교회의 말 한마디는 중세 유럽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 최우선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의 내세관을 믿었으며 삶의 상당 부분에 대한 가치판단을 성서에, 그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해석에 위임하였다.
당시에 성서는 대중들이 쉽게 습득하기 어려운 라틴어로 된 '불가타 번역본'만이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사제들 외에 일반 대중이 성서를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교회법으로도 사제가 아닌 자의 성서 해석은 이단적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렇듯, 사제들의 성서 해석의 독점으로 인해 성서 해석이 왜곡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쉬웠고, 일반 대중들이 이를 쉽사리 알아채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페스트의 공포와 전쟁의 황폐함이 유럽전역을 덮었던 시절, 교회의 위기 상황 앞에서 가톨릭 지배계층은 성서의 왜곡된 해석을 통해 면죄부 정책 등을 실시하여 일반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였다.
드레스덴 성모 교회 앞의 마르틴 루터 동상.
이런 상황 가운데, 갑자기 마르틴 루터라는 젊은 사제가 나타나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걸어 유럽 사회를 놀라게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루터가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해서 대중들에게 보급한 것이다. 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짐에 따라,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판 성서는 값싼 가격에 대중들에게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주의' 즉 사제뿐만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도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같이 바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상(즉, 신 앞의 평등사상)이 퍼지면서, '성서'라는 텍스트를 대중들이 스스로 읽고 해석(종교개혁 이전에는 이단으로 몰릴 수 있었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3. 텍스트를 통한 지배
모든 견고한 권력들은 사회의 핵심적인 텍스트를 독점함으로써 규율을 만들고, 이러한 규율을 통해 지배와 통제권을 행사한다. 중세 시대의 ‘성서’나 현대 사회의 ‘법’이 그러한 텍스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규율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를 권력의 주체가 독점하는 순간 규율에 권력층의 은밀한 의도를 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중세 가톨릭 권력의 지배하에, 평범한 기독교 신자들은 그 누구라도 사제들이 선포하는 규율에 의문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기 쉽지 않았다. 성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사제의 해석 앞에서 그 규율을 몸과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것 말고는,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없는 민중들이 달리 취할 수 있는 방편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앞서 말한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작업은 가톨릭 지배계층이 해석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성서를 민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법’이 규율의 근간이 되는 핵심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에,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고, 법으로서 판단하는 권력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권력작용에 대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법 개정, 법을 집행하는 기관 구성원의 교체, 권력기관의 개편 등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최근 공수처가 신설되고, 검경수사권의 조정이 이루어진 것을 떠올려보자).
4. 우리 사회는?
현대 한국사회는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따라서 중세 가톨릭 권력의 주된 규율 근거였던 성서에 대응하는 ‘법’을 위주로 권력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법을 제정하고, 법에 의해 각종 국가 사무를 집행을 하고, 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와 갈등들 또한 법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핵심 작용이다.
법이 규율하는 영역은 매우 방대하고 촘촘하기 때문에 법의 그물망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삶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문제는 중세 가톨릭 지배계층이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권한을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에 대한 해석권한이 소수의 전문적인 자들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에 있다. 물론 법은 모든 사람들이 해석하고 공부할 수 있지만, 워낙 방대한 내용과 어려운 용어, 그리고 쉽게 파악되지 않는 논리 탓에, 법전문가가 아니라면 쉽사리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해석이야 자유지만, 소송에서 지거나 법 위반으로 인한 행정처분을 받는 등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소수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법의 해석과 적용의 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각종 권리를 주장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소송에서 개개인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법이라는 텍스트를 해석, 적용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와 같은 일명 법조삼륜 이외에도,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과 법을 집행하는 정부조직 또한 소수의 권력 계층이다. 결국, 현대 한국사회는 법을 둘러싼 입법, 행정, 사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전문가들이 권력을 가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권력층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법을 제정・집행・해석할까? 아니면 성서 해석을 왜곡해서 면죄부를 팔아 성베드로 성당을 지은 중세 가톨릭 지배계층처럼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게 법을 제정・집행・해석할까? 이 부분은 각자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