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밤낮 없는 개인주의적인 영어 학습의 유전일까. 고칠이 누나도 영어를 잘하고, 동생은 완전히 영어박사 수준이다. 못 읽는 영어잡지가 없을 정도이다. 동생 책장에 가보면 무슨 영어 원서가 뭐 그리 많은 지 놀랄 정도다.
고칠이도 아빠의 유전 덕택일까, 그는 영어에 대해선 싫지 않았다. 그의 영문법 실력은 대단하다. 과학과목 등은 거의 연필 굴리면서 찍기 바쁜데, 영문법은 10개 문제 중에 최소한 7, 8개 문제 이상은 맞힌다. 그 덕분에 대학도 가게 됐다.
고칠이도 동생처럼 책장은 있다. 하지만 동생만큼 책은 그리 많지가 않다. 한 100권 정도가 있는데, 영어에 대한 책이 무려 60권 정도나 된다. 영문법 토플 책 토익책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나머지 책은 소설책이다. 거의 3류 소설에 가깝지만, 책 읽는 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고칠이는 영어로 된 원서는 잘 읽지 못한다. 문법 위주의 학교 교육이 자신을 영어원서 하나 못 읽게 만들었다고 불평한다. 반면에 동생은 다른 말을 한다. 영어문법을 알아야 정확한 영문 해석과 독해가 가능하다고.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영어로 노래하는 걸 즐긴다는 고칠씨.
고칠이는 수학이나 과학을 못한 것에 대해서는 오로지 추상적인 사고를 못하는 자신의 머리 문제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비하시킨다. 하지만 영어의 경우는 다르다. 항상 자신을 턱없이 비하시키는 그의 모습과는 다르다. 영어에 대해선 자신 있어 한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천천히 혼자 팔짱끼는 자세로 바꾸더니, '영어 학습' 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어공부 방법에는 왕도가 없지만, 노력하면 됩니다. 계속 반복하면 되고, 노력한 만큼 보답을 주는 게 영어예요."
영어를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노력의 부족이리라.
“그러면 고칠씨가 추구하려는 지식은 실용적인 지식인 겁니까? 수학과 과학은 크게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니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추상적인 이론이라고 생각되나 봐요. 학습에도 능률이 오르지 않고……”
“그런 것 같아요. 영어만큼은 실생활에 필요하고 구체적이다 보니, 노력하면 되겠다는 자신감도 생겨요. 국제화 시대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고요.”
“고칠씨와 비슷한 입장일 듯한 생각을 이미 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근대 경험론의 선구자격인 베이컨(F. Bacon, 1561-1626) 인데, 그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최고로 여겼어요. 베이컨은 아는 것은 힘이라고 주장하면서, 학문의 목적은 사람의 삶을 개선시키고 풍족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베이컨은 중세시대 지식이 신 중심의 지식이어서 실생활과는 너무 동떨어진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했다.
“고칠씨, 이건 아시나요? 베이컨의 4대 우상이요?”
“우상이요? 미신?”
“비슷한 말입니다.”
베이컨은 올바른 선입견을 방해하는 선입견을 우상이라고 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봤다.
• 종족의 우상 : 세상의 사물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오류.• 동굴의 우상 : 개인이 처한 주관적인 환경 즉, 동굴 안에서 세상을 보면서 전체라고 여기는 오류.
• 시장의 우상 : 사회생활(시장)에서 부정확하게 사용되는 언어가 만든 편견.
• 극장의 우상 : 신문이나 TV 등의 권위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편견.
“많은 이들이 티비나 신문만 보면 다 그 뉴스가 옳은 줄 알아요. 대중은 늘 속아요. 아이큐77인 나도 의심스럽기만 하는데 말이에요. 극장의 우상. 이것을 너무 쉽게 믿네요,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