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칠이네는 돈 버는 사람이 아빠밖에 없다. 엄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교회 봉사랑 살림만 해오시던 분이라서 돈과 관련해 일해 본 적은 없으셨다.
고칠이의 누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학에 대해 너무 집착한 나머지 건강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로 일 보다는 건강을 회복하려는 데에만 모든 노력을 쏟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정말 갑갑한 집안이었다. 고칠이 동생은 학교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고칠이도 대학을 갓졸업한 후라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공부를 동생처럼 더 많이 할 생각도 없고, 또 굳이 공무원 등의 준비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의 선택은 좋은 회사, 안정된 회사에 취업하는 거만 남아있는 셈이다. 더욱이 그는 장남인지라 집에 대해 어깨가 더욱 무거웠다. 그로서는 자신과 집을 위해 회사에 취업하는 게 최상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고칠씨가 자신의 가정 분위기까지 고려한 선택은 '조화' 라는 단어를 연상케 합니다. 만일 고칠씨가 조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가정이 행복하게 될 거라는 보장은 없어질 것입니다. 고칠씨는 나름대로 조화를 최상의 덕목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미래사회의 인격은 이처럼 조화를 중시하는 거겠죠. 더욱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전통적인 덕목과 민주사회의 보편적인 덕목을 조화시킨다면, 미래사회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은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게 거창할 것까지는 없어요. 저는 다만 집이 걱정되었어요. 아빠 빼고는 돈 벌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그렇게 말하시는 걸 보니, 고칠씨는 어른스럽네요.
전통사회의 덕목은 절제, 자연 친화성을 강조하다보니, 자원부족 자연파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적합했어요. 민주사회의 덕목에서는 공정성, 정직 책임의식을 강조하면서 사회나 타인에게 피해를 쉽게 주지 않았어요. 이 같은 전통사회덕목과 민주사회덕목을 조화시킨다면, 훌륭한 개인과 사회가 될 거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고칠이 아빠는 작년과 달리 항상 어깨가 축 늘어져 보였다. 그의 가족은 '이젠 아빠도 연세가 드셔서 그러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며칠 지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주량이 한두 잔밖에 안 되는 소주나 전통주를 거의 한두 병이나 드시고 들어오신 게 아닌가.
고칠이 식구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는 거다. 특히 엄마가 더 깜짝 놀라셨는데, 그 다음 날 엄마는 아빠랑 뭔가 깊은 대화를 나누시더니, 엄마가 눈시울을 적시며 방문을 열고 나오셨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엄마는 고칠이 보다는 동생을 불러 긴 대화를 하셨다. 엄마는 고칠이에게 말하면 가뜩이나 장남인데 더 부담돼서 의기소침할까 봐 동생을 불러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거다.
아빠가 '부도위기' 라는 것이다. 아빠가 조금은 사업을 크게 해보려고 욕심낸 게 화근이 되었다는 거다. 가뜩이나 우리 사회 경기도 안 좋은데, ‘엎친 데 덮친 격’ 이었다.
고칠이 동생은 엄마의 이런 말을 듣고도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진짜 웃긴 녀석이었다. 동생은 처음엔 재수 없고 건방져 보였다. 그래도 동생을 보고 있으면 마음의 안정은 되었다.
고칠이는 내심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네가 장남이어 봐라,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거다.'
그런데 후에 안 얘기인데, 고칠이 동생은 남몰래 모아 놓은 돈이 좀 있었나 보다. 아빠가 부도 위기에 있을 때, 이자 빚을 막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동생도 결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아빠 이자 갚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아빠는 부도처리한 후 집도 저당 잡혀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동생은 두 번째 자신이 모아놓은 자금을 풀었다. 동생은 어떻게 해서 학교 다니며 돈을 모았는지 신기할 정도다. 비결은 또 나중에 알려진 것인데, 학교 다니면서 영어번역 등 닥치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아르바이트를 다해봤다는 거다.
동생은 아버지께 대학을 마치고 미국 예일대학이나 미주리대학 등으로 유학 가겠다고 했는데, '네가 그건 알아서 하라.' 는 말을 듣고, 유학비용을 꾸준히 모았다는 거다.
목표만은 확실한 녀석이었다.
아빠의 예기치 못한 부도로 안타깝게도 동생은 유학은 못 가게 되었다. 눈물 같은 동생의 비자금 보탬 덕분으로 새 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이전 집 보다는 비좁아 보이고 작았지만, 가족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통나무집처럼 너무나도 아늑한 집이었다.
그때 고칠이는 '빨리 취업해서 아빠를 도와야지.'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정이 많은 효자다, 고칠이는.
“신유교 윤리라고 불리 우는 '아시아적 가치'란 용어가 있어요. 이 용어는 한국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등의 유교문화가 국가 경제발전의 원인이 됐다는 의미를 간직하는 말이에요.”
“별 이론이 다 있네요.”
“그러게요. 학자들은 이론을 너무 많이 만들죠? 하하. 즉, 아시아적 가치는 공동체주의 가족주의 사회적 도덕성 책임성 등을 핵심가치로 두고 있는 데, 아시아적 가치의 영향으로 동양회사들은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기업문화와 달리 가족적인 기업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죠.”
“가족적인 기업문화라…….”
“이에 따라 동양의 회사원들은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회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서구와는 다른 방식의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의미입니다.”
“가족 중심의 경영관도 장점이 되는 군요?”
“고칠씨의 강한 가족주의적 입장이 우리 사회 기업문화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예요. 이 같은 장점은 서구 기업문화에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이로 인해 파생된 정경유착, 뇌물관행, 그리고 연고주의 등이 경제발전을 더디게 하는 건 아닌지요.”
“장단점을 떠나, 그땐 우리 집이 아빠의 부도로 삶의 희망이 사라졌었어요. 가난이 뭔지, 사는 게 지긋지긋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