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메의 <카르멘>을 중심으로
1. 서론.
상호 독점적 연애 관계는 끝없이 재생산되는 신화 중 하나다. 그런데 연애 관계는 둘만이 나눌 수 있는 감정일까? 종종 진한 우정은 열정적인 사랑과 구분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성욕의 유무가 답이라고 하지만 연애적 사랑이 언제나 성적 욕구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답은 주로 독점욕이다. 즉, 연애적 사랑이라면 독점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부터 이 명제가 믿음일 뿐이며 일종의 프로파간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2. 본론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길 원한다. 인간은 다른 종과 자기들을 구분하고 우월성을 입증해왔다. 더불어, 모든 인류는 본질적으로 같으니 개성을 찾으려는 본능은 필연적이다. 인간은 무리 동물이므로 관계 속에서 특별함이라는 우위를 점하려 한다. 돈 호세는 일관적으로 카르멘시타의 '롬'이 되려고 한다. 카르멘시타가 자기를 사랑하길 바라는 것을 넘어 그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마다 돈 호세는 아찔한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은 사랑보다는 그것을 독점하는 구도에서 온다. 카르멘시타를 독점할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를 죽여버리는 행동에서 돈 호세가 욕망한 것은 그가 아닌 그를 독차지할 때 느끼는 쾌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지만 그는 카르멘을 죽일지언정 자살하지 않는다. 즉, 돈 호세의 독점욕은 카르멘시타를 향한 사랑이 아닌 자기애다. 그러므로 독점욕이 있어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
포유류 중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동물은 극히 소수다. 보통 수컷은 종족을 퍼뜨리고자 많은 암컷과 관계를 맺고 어떤 암컷들은 둘 이상 수컷의 새끼를 배기도 한다. 모계사회에서는 자식의 혈통이 확실하므로 굳이 짝짓기 기회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등장으로 형세가 뒤집혔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남성은 자식이 자기의 자식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권력을 독점, 유지하는 방법의 하나는 '자기'의 자식에게‘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남성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여성에게 오직 자기와의 성관계만 허용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재생산권을 독차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긍정적 가치에 독점욕을 끼워 넣었다. 그것을 받아들인 여성은 남성의 독점욕이 자기의 존재가치를 드높인다고 오해한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욕망하게 함으로써 지배 계층은 재생산 능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인 셈이다. 이 근거들이 모두 참이라면 독점욕 없는 연애적 사랑이 존재해야 한다.
폴리아모리는 라틴어로 둘 이상이라는 접두사, poly에 사랑을 뜻하는 amor의 합성어인데, 우리말로는 다자연애다. 알다시피 다자연애는 분명히 존재한다. 독점욕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리를 홀로 차지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다자연애자들은 이 믿음을 정확히 반박한다.
3. 결론
독점욕이 있다고 불건전한 관계라는 얘기가 아니다. 독점욕이 없어도 건강한 연애 관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한 사람에게 딱 맞는 오직 한 사람'이라는 신화에 매몰되어 있다. 이 오류를 벗어난다면 인류는 사랑을 핑계로 벌어지는 무수한 문제들을 정확힌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