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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미상궁 라하 Nov 11. 2024

02. 풍부한 해석의 여지로 감상자를 즐겁게 하다

<돌아가다.> / 이지원 / 숙명여자대학교 공예과 졸업전시회

안녕하세요, 여러!

정말 드문드문 찾아뵙습니다.

입동이 지나고,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저는 발난로의 은총을 누리면서 원고를 마감하고 있네요.

여러분께 전기장판 위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여유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숙명여자대학교 공예과의 졸업전시회에 친구 작가의 작품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15시 30분쯤 도착했는데, 벌써 사람이 복작복작하더군요.

저번 현대미술 공포증 극복의 날 이후 예술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상자의 해석까지 예술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작품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는 걸 보니 제가 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사실 졸업전시가 특정 주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전부 자유주제라는 점을 뒤늦게 알아서 작품 배치에 약간 놀랐습니다.

전시회장 4개에 놓인 졸업작품들의 주제가 퍽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예비(?) 작가들의 멋진 잠재력이 전시회장이 가득 찬 게 보여 이것저것 보다 친구 작가의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아래 작품이 이지원 님의 작품입니다.

이지원 작가의 조형 및 설치 작품. <돌아가다.>

제목이 <돌아가다.>인데, 여기서 제목의 마침표가 왜 붙었는지 의아했지요.

작품 제목에 느낌표나 물음표가 들어가는 건 자주 본 듯한데, 온점이 들어가는 경우는 제 짧은 교양에선 자주 보지 못했거든요.

또, '~(쪽)으로'나 '~에서' 등 장소나 방향을 지칭하는 앞말이 전혀 없는, 순수한 동사인 제목이라 간결하고 단호하게 느껴졌습니다.

돌아간다니, 어디에서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요?

이 말은 돌고 도는 회귀를 의미하는 걸까요, 죽음을 돌려 얘기하는 '돌아가시다'에 가까운 뜻일까요?

QR 코드로 접속하면 작품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지원 작가는 온점을 찍은 까닭이 어떤 '마침'을 의미한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버려진 존재가 흙이나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원래로 '돌아간다'고 해석했다고 해요.

그는 버스정류장이나 재활용 가구 쓰레기장에서 자주 보이는 '버려진 의자'에 특히 주목했는데요.

실제로 이번 전시 작품이 그의 거처 앞에 느티나무 아래 버려져 있던 의자에서 받은 영감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방명록과 영감을 얻은 이미지 모음집, 영감을 얻은 의자 사진. 방명록과 모음집은 직접 제본.

의자는 어쩌면 인류에게 '쉼'을 준 가구일지도 모릅니다.

누워서 쉬는 것과 서서 쉬는 것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니까요.

작가는 버려진 의자, 즉 버림받은 존재인 의자를 붕대로 감싸, 그것을  치료, 치유하고 위로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붕대는 얇고 길쭉한, 부드러운 천이지만 여러 번 덧대어 감으면 강력한 힘으로 상처를 동여맬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보여주듯, 작가는 의자 형태를 붕대로 감거나 본을 떠서 그 마음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요.

좌에서 우로. 기다림 / 부서짐 / 연약함 / 느티나무 그늘 밑 의자였던 것

작가가 의자들을 '치료'하면서도 우리가 아는, 소위 '온전한 기능을 하는 완벽한 형태'로 되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작가는 치료라는 행위의 본질이 도구적인 기능의 회복이 아닌, 보듬고 위로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의깊게 볼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요.

위에서 왼쪽 이미지는 하얀 나무 의자가 아니라, 하얀 나무 의자를 거즈로 본을 뜬 의자의 형태입니다.

홀로 설 수 없을 만큼 가벼워서 공중에 띄워놓은 겁니다.

자세히 보시면 용접한 와이어 등으로 형태를 지탱하고 있지요.

반면 오른쪽은 왼쪽 작품처럼 반투명하고 하늘하늘한 느낌 없이 도기로 만들어, 딱딱하고 튼튼한 재질입니다.

하지만 태의 온전함에서 보면 전자는 의자라고 인식되지만, 후자는 가장 왼쪽 작품을 보면 의자라는 형태를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껍질을 본뜬 '거즈 의자'는 의자지만, 부서졌어도 딱딱한 '의자의 파편'은 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쿡 누르면 바스라질 만큼 연약하고, 망가진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은 홀로 땅을 딛고 설 만큼 단단하다는 은유가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지난 현대미술 공포증 극복의 날 이후 모처럼 좋은 작품을 만난 기쁨으로 이번 글을 쓰는 중입니다.

이지원 작가는 자기만의 시선을 작품에 온전히 담아내는 특유의 풍이 있다고 보는데요.

그가 앞으로 걸작을 낼 때까지 옆에 잘 붙어있을 예정입니다.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은 정말 달갑고 풍성하네요.

아름다운 걸 보면 살 맛이 나는 그 감각을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방명록을 정말 열심히 썼는데 찍어오지 못해서 아쉽네요.

이지원 작가의 <돌아가다.>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은 11월 13일 수요일까지 숙명여자대학교 프라임관 지하1~2층에서 느긋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1캠퍼스 정문 경비소로 가서 출입허가증을 받는 것도 잊지 마세요:)


오늘 제가 느낀 풍부한 울림이 여러분께도 닿기를 바랍니다.

혹 현대미술의 난해함에 거리감을 두신 분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로 그 벽을 훌쩍 넘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저는 다음 감동포인트에서 돌아오겠습니다.

아디오스!

* 01. 현대미술 공포증 극복의 날 https://brunch.co.kr/@webnovel-review/45

숙명여자대학교 공예과 졸업전시회
<돌아가다.>

이지원

일시: 2024.11.7~11.13
장소: 숙명여자대학교 2캠퍼스 프라임관

*주차 공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대중교통 이용이 더 편리합니다.

*이 글은 그 어떤 협찬도 없이 쓰인 내돈내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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