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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질시스터즈 Mar 11. 2021

한 달 동안 프랑스에서 어떻게 버틸까

프랑스 어학당에서의 30일

| 가장 보통의 좌절


20살에 첫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반에서 유일하게 대학 원서를 넣지 않은 탓에 교실에서 담임에게 공개적으로 망신도 당했다. 재수를 결정하고서 독서실 총무로 일하며 공부를 했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로 두 번째 수능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수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지원했다.


나도 결국 그저 그런 어른으로 커간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두 번의 수능이 끝나니, 어쩐지 나는 나에게 실망감이 들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결과를 가져다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애써 입학한 대학은 자나 깨나 취업난 이야기만 들려왔다. 인문대는 취업이 어렵대. 경쟁률이 몇백 대 일 이래. 고스펙자들이 그렇게 많대. 너 취업하려면 1학년부터 당장 준비해야 돼. 이런 이야기에 휩쓸려 당장 오지도 않은 미래를 덜컥 겁내곤 했다.


그때는 어찌나 내가 보잘것없이 느껴지던지. 나를 원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을 것 같아 자꾸만 마음이 꺾였다. 그럴 때면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내 머릿속은 마치 작고 어두운 상자 안에 갇힌 것 같았다.



파리의 어느 길



| tu viens d'ou? 어느 나라 사람이니?


단기 어학 연수로 난생처음 유럽 땅을 밟게 되었을 때도 나는 감흥이 없었다. 너무 지쳐있던 탓인지 파리고 리옹이고 모든 게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흑백 세상이었다. 30일이나 여기 있어야 한다니. 어떻게 버티지. 뭐 이런 생각을 했다. 어학당에서 프랑스어 테스트를 보고 기초반으로 들어가 꾸역꾸역 수업시간을 버텨냈다. 수업이 끝나면 숙소에 들어가 잠만 잤으니, 다시 생각해보면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러다가 2주일 정도 흘렀을 무렵, 선생님이 같은 반 사람들끼리 묻고 답하기를 시켰다. 반의 모든 사람과 한 번씩 대화를 나눠야 했는데,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전엔 깨닫지 못했는데 우리 반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손녀를 둔 60대 영국인, 전자공학을 전공 중인 스페인 여대생, 홀로 딸을 키운 40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자 생활을 했다는 30대 아랍인 등등.


우리들은 나라마다 프랑스어 발음도 너무 달랐고, 서로 서툰 프랑스어로 떠듬떠듬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간혹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멋쩍게 웃기도 했다. 다들 프랑스 기초를 배우고 있는데 인종이며 직업이며 천차만별인 게 어쩐지 신기했다. 40-50대로 보이는 일본인은 프랑스어 강사를 준비 중이라며, 뒤늦게 꿈에 도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 정말이지 살아가는 방식은 다 제각각이구나. 뭐랄까, 처음으로 꽉 막힌 머릿속 상자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만 나는 그 작은 어학당 교실에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서툰 프랑스어로 “tu viens d'ou? Quel âge? (너 어느 나라 사람이니? 몇 살이야?)라는 대화를 나누게 된 순간에서야 이 당연한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수업시간에 가만히 앉아서 같은 반 사람들이 “아파트”, “주택” 같은 기본 프랑스어를 소리 내배우는 풍경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풍경을 몇 번씩이고 경험한 후에 나는 천히 프랑스가 아름다워 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발길이 닿는 모든 곳마다 새로운 기회로 보였다. 좀 부족하더라도 어디든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무 조급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초조했던 마음에 작은 희망과 여유가 슬그머니 들어선 것이다.


지금도 종종 마음이 내몰릴 때마다 그 어학당 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세상은 넓으니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글. 강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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