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질시스터즈 Mar 21. 2021

8년 만에 매일 집밥을 먹게 됐다

한 끼에 얼마나 진심이세요?

 - <영원한 허기는 없듯이> 中 -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초코파이가 뭉개진 것 같다. 느낌이 좋지 않다. 조심스레 봉지를 뜯어 겨우 입에 넣을라치면, 교수님의 한소리가 돌아온다. 꿋꿋하게 손바닥 정도의 초콜릿 응고물을 몇 입에 해치우고, 손등으로 입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그래도 여전히 허기가 진다.

나의 스물은 공복의 시간이라 그 어느 때보다 얄팍하고 허줄한 계절이다. '청춘'하고 부르면 잇새부터 돋아나는 싱그러운 풋내와는 다르다. 지금 내 상황은 고등학교 때 품은 기대와 어긋나 있는 거다. 원하는 일을 하기엔 하루는 너무 짧고도 고달프다. 나는 아침잠에 쫓기며 끼니에 굶주리고 수업을 들으러 헐레벌떡 뛰어가며, 그 일과를 마칠 즈음엔 제법 녹초가 되어 기숙사 침대에 쓰러진다. 이건 여전히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라 느끼며, 그럭저럭 한 하루를 맨밥 삼키듯 씹어 넘긴다.

잠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미룬 과제에 쫓기고, 진로 문제에 쫓기고, 이렇게 쫓겨만 다니는 나는 그래서 허기가 지나 보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나는 깊은 굶주림을 느끼고 있다. 틈날 때면 멋진 사람들의 칼럼을 훑으며, 그 열정과 노력들에 목말라한다. 특히 지금의 내 모습과 이뤄내고 싶은 그 모습의 뼈 아픈 간격을 느끼면서 말이다.

나를 채색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물감들. 중고등학교 때 그 시절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줬고, 여전히 부진한 짝사랑 중인 것들. 바쁘다는 변명 하나로 미뤄왔던 꿈들이지만 앞으로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요새 느끼는 바에 의하면, 살면서 가장 생생한 진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스물이다. 이 스물, 이렇게 끌려만 다니기엔 너무 아깝다. 스물의 나는 여전히 삐딱하고, 게으르지만 앞으로 차츰 나아갈 수 있기를.


나는 물욕이 거의 없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음식의 경우도, 먹고 싶은 것도 끌리는 것도 딱히 없어 쉽사리 고르기 힘들 때가 많다. 커서부터는 대충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살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으니, 매일같이 먹었던 집밥의 기억은 중학교 3학년 때가 마지막이다.


그 뒤로는 정성을 들인 식사를 하는 것보다 급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닥쳐오거나, 아니면 나에게 그런 음식을 대접할 환경이나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안의 어떤 '허기' 같은 것들을 잘 느꼈다. 오죽했으면 스무 살에 쓴 에세이 제목이 <영원한 허기는 없듯이>였을까.


이런 나와 달리, 친언니는 어릴 때부터 물욕이 많았다. 매일 문방구를 기웃거리며 각종 군것질거리를 사 오다, 부모님께 핀잔을 듣곤 했다. 어쩌다 보니 집안 및 개인 사정들이 겹치며 작년 초부터 나는 대학 기숙사를 나와, 친언니와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감바스, 샐러드, 바질 페스토 파스타(왼) 에그인헬, 바게트, 발사믹 소스(우)
레몬청(왼) 딸기주스, 샌드위치(중) 마늘바게트(우)


언니는 원래도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도 좋아했다. 자취를 하게 되면서 언니는 언니만의 주방을 갖게 되었고, 각종 식재료와 필요한 도구들로 주방과 냉장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언니는 먹방을 수시로 보면서, 끼니 때가 가까워지면 그날마다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산해냈다. 나는 내가 혼자 살았더라면 절대 시도해보지 않았을, 먹어보지 않았을 것들을 매일 저녁에 먹게 되었다.


밀푀유 나베(왼) 월남쌈(우)
사케동, 연어초밥(왼) 아보카도 명란 덮밥(우)


언니는 만두 속재료를 만들어 만두를 빚거나, 유리과 래디쉬를 사와 적보라색 피클을 담그는 일들을 혼자 곧잘 해냈다. 나는 고작 언니가 만든 피클을 통에서 꺼내 종지에 옮겨놓는 정도로 식사 준비를 도왔지만, 사는 환경과 식생활이 달라지니 여느 때보다도 생활에 대한 안온함을 느끼게 되었다.


냉장고는 언제나 가득 차있고, 매일 다른 종류의 정성 들인 음식을 먹는다는 것. 여전히 나는 스무 살 때와 다름없이 진로 문제나 시간에 쫒기고 있는 점은 분명하지만, 정성 들인 음식을 먹는다는 건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만두, 고기김치만두로 만든 만둣국
그 외 소소한 요리들


아무튼 잘 먹으면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글. Sue

매거진의 이전글 한 달 동안 프랑스에서 어떻게 버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