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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질시스터즈 Jun 21. 2021

초등학생이 혼자 중국에서 살아가는 법

해당 글은 yes24 <나도, 에세이스트> 20회 가작 수상작 

<혼자 먹는 아이스크림은 어찌나 달콤한지>와 동일한 작품으로, 제목을 수정한 에세이입니다. 






여름의 눅진한 공기를 맡고 있으면, 불쑥 떠오르는 짧은 여름의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국 남부 도시에 홀로 우두커니 살게 된 12살 여름의 일이다. 중국행 비행기에서 혼자 내린 12살 아이는 집으로 가는 길도 몰랐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가족이 없던 나는 중국인들에게 길을 물으며, 내 몸만 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귀신은 무서워도 사람 무서운 줄은 모르던 초등학생이라 중국의 낯선 밤길 한가운데서도 그다지 위기감이 없었다.


나는 난생처음 부모님의 곁을 떠나 누리게 된 자유에 살짝 들떠 있었다. 아마 그것이 어린 나에게는 인생 첫 독립이었으리라. 그러나 겁도 없이 씩씩하게 찾아간 집은 어둡고 적막했다. 반겨주는 이 없이, 중국 땅에 혼자 똑떨어져 맞이한 첫날밤에는 밤새도록 여름 스콜이 내렸다.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줄기와 번개 소리는 맹랑한 어린아이를 겁주는 자연의 얄궂은 환영이었다. 중국에는 그런 여름밤이 참 많았다. 나는 스콜이 마구 내리는 밤이면 안방 침대로 슬그머니 기어들어가 혼자 웅크려 한참을 뒤척이곤 했다.


해가 뜨면 배를 채우는 일이 문제였다. 엄마의 품을 처음 벗어난 초등학생은 밥 한 그릇 만들 줄을 몰랐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겨우 쌀을 씻고, 손이 담길 만큼만 물을 채워서 처음으로 밥을 만들었다. 작은 손으로 만든 밥은 물이 부족해서 생쌀이나 다름없었다. 그 여름 내내 삼시 세끼 반찬이라곤 한국에서 미리 연습해온 된장찌개와 계란 프라이, 김치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는 가장 야무진 어른인 엄마를 따라 하며 직접 만든 요리에 잔뜩 뿌듯해했다.


타지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에는 물론 외로움도 뒤따랐다. 현지 소학교에서는 중국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겨우 떠듬떠듬 말하거나 눈치껏 웃으면서 듣고만 있을 때가 많았다. 동네 친구는커녕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가끔 엄마와 저녁에 통화하는 15분 정도가 내가 유창하게 말하는 전부였으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별로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출처 unsplash



“우리 딸, 거기 생활은 어때? 오늘은 뭐 했어?”

“지금 밥 먹고 누워있어. 엄청 좋아!”


26살의 나는 여름마다 엄마와 그때의 일을 회상해보곤 한다. 엄마는 어린 내가 혼자 씩씩하게 잘 지내는 게 너무 신기했다고 한다. 쌀도 씻을 줄 모르고, 친구도 없는 12살은 아무도 자길 찾지 않는 그 여름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


그 여름에는 분명 외로움을 앞서는 자유의 설렘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빠 통장에서 100위안(약 만 원)을 꺼내 쓰곤 했다. 만 원은 세상을 가질 수 있는 돈이었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유 아이스크림을 한 봉다리 가득 사 와, 거실에서 와작와작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혼날 걱정 없이 속 편하게 혼자 먹는 아이스크림은 모르긴 몰라도 열 배는 달콤했다. 선풍기를 틀어 더위로 열이 잔뜩 오른 이마를 식히다가, 우당탕탕 야채를 손질해서 저녁을 만들었다. 밥을 먹고 나면 눈치 보지 않고, 소파에 누워 일본 만화를 보며 저녁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 종종 새벽에 스콜의 공포를 혼자 견디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난 왕뚜껑만 한 바퀴벌레와 30분 동안 대치하여 끝내 승리하기도 했다. 내 마음대로 만드는 나의 하루. 12살의 눈에는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하루가 엄마가 땋아주는 예쁜 양갈래보다 새롭고, 내 몸집보다 아주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보다 싫어하는 이유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26살의 나에게 후덥지근한 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여름은 분명한 불쾌의 계절이다. 자외선을 피하려고 썬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런 재미없는 어른이 된 나에게 혼자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 것도 대단하게 느껴지던 12살의 짧은 여름은 내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순수한 자유의 기억이다. 아주 시원하고 단맛으로 가득 차 있던 시간들. 이제는 잘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여름의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 김신회 작가님 심사평 -

<혼자 먹는 아이스크림은 어찌나 달콤한지>를 읽으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요.
12살이라는 나이에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가는 일만으로도 대단한데,
혼자 살면서 혼자 요리를 해 먹으며 지냈다니요!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저의 12살 시절이 생각나면서 감탄했답니다. 그 대단한 시절을 ‘별일 아니었어요! 오히려 저는 즐거웠어요!’라는 듯 산뜻하게
이야기하는 글도 참 신기했고요.

‘내 마음대로 만드는 나의 하루~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라는 문장에는 저도 모르게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원조 <나 혼자 산다>가 아닌가! 하면서요. 이 대목에서 글쓴이의 용기와 강인함을 느꼈습니다. 글쓴이의 남다른 여름의 기억을 만나볼 수 있어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글. 강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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