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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Jan 03. 2017

"아줌마"들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까

<부암동 복수자 소셜클럽> 리뷰

<닥터 프로스트>의 이종범 작가는 재미있는 작품의 공통점을 1)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얻기 힘들고 2) 나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자토끼 작가의 <부암동 복수자 소셜클럽>(이하 복자클럽)은 이 요소를 모두 가진 웹툰이다. <복자클럽>은 한마디로 '아줌마들의 복수기' 라고 할 수 있다. 홍도, 미숙, 정혜. 이 세 명은 복수를 간절하게 원하지만, 복수의 대상이 복수하기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수를 이루기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 그 복수의 대상은 바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거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미숙과 정혜가 쥔 복수의 칼날은 남편들에게로 향한다. 홍도는 자신의 자식에게 해를 끼치는 아이의 부모에게 복수를 꿈꾼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아줌마'다. 우리 삶에 깊이 파고들어 어디에서나 만날수 있고, 누군가는 스스로 될지도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작품 내에서 그 자식들이 겪는 이야기는 우리가 직접 겪었던 일이거나, 가까이서 본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꿈꾸는 복수는 소소하지만 너무나 얻기 어려운 것들이다. 자칫하다간 자신의 가정을 무너뜨릴 수 있고, 자식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때문에 <복자클럽>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홍도는 부암 재래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미숙은 교육감에 출마하는 남편을 둔 가정주부다. 정혜는 남편이 결혼전에 얻고 숨겨놓았던 혼외자를 데려온, 재벌집 사모님이다. 이렇게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복수'라는 행동을 위해 뭉치고, 얻기 어려운 것을 위해 연대하는 '아줌마'들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흥미를 준다.

* 작품 속 등장인물 표현

 작품속 캐릭터 뿐 아니라 그 표현에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복수의 대상인 남성들은 눈동자가 표현되지 않는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고 몰개성적으로 그려낸 복수의 대상에서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보통 눈동자를 생략하는 건 눈동자 표현이 어려울 때, 또는 인물의 특징을 지우려는 표현이다.


정혜의 남편(좌)와 수겸. 정혜의 남편은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주로 엑스트라나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눈을 지우는 것으로 많이 나타난다. 이렇게 눈동자를 표시하지 않는 것은 익명성을 부여하거나, 보편성을 부여한다. <복자클럽>에서는 악역을 맡은 복수의 대상들의 눈을 지움으로써 작가는 주인공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들에게 보편성과 익명성을 부여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비슷한 고통을 주고 있거나 주었던 누군가를 투영하도록 유도한다. 이로써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가해자인 그들을 타자화해 볼 수 있고, 그들의 행동에 이입하지 않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해 피해자에게 또 한번 고통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작가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가해자들을 타자화 시키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만든다.

* 정상가정이라는 환상, 가부장성에 도전하는 주인공

 작품에서 '정상가정'이라는 환상을 비추는 지점도 흥미롭다. 흔히 정상가정이라면 부모와 자식이 화목하게 지내는 그림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삶에 정상가정은 그리 흔하지 않다. <복자클럽>은 그렇다면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주인공 홍도, 미숙, 정혜는 모두 정상가정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정에 살고 있다. 홍도는 남편을 사별한 후 홀로 딸과 아들을 키우고 있고, 정혜는 본인이 불임이라 자식이 없지만, 남편이 결혼전에 낳은 혼외자와 함께 살게 됐다. 겉보기에 가장 정상적인 가정인 미숙의 가정은 남편의 잦은 주취폭력, 병든 시어머니, 그리고 사고로 잃은 아들에 대한 아픔으로 망가지고 있다.

<복자클럽>은 복수의 대상을 정상가정의 '가장'으로 상정해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들을 그리고 있다. 이런 가부장성은 우리 안에 아주 깊이 스며들었다. 자기소개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클리셰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지 있는지 알고 있다. 이런 클리셰는 '정상가정'이라는 환상을 현실세계에 쌓아올린다. 가정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에 대한 선입견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지 못한 정상가정은 결핍이 되어 돌아온다. 가부장제의 권력서열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에겐 "내 노력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에겐 "나는 좋은 자식이 아니다" 또는 "나는 억압받은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돌아온다. 결핍은 갈망을 낳고, 우리는 다시 정상가정에 대한 환상을 키워간다.


가질 수 없는 환상이 흔히 그렇듯이, 이상적인 가정은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마당이 있는 넓은 집과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 같은 것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부장의 능력, 집을 관리하는 부인의 내조 같은 것이 깔려있다. 그렇게 정상가정 판타지는 그것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그 권력은 가부장제에서 서열화하는 권력 순서대로 분배된다. 연령순, 혈통순, 성별순 등등의 기준으로.

때문에 복수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은 정혜여야 한다. 대기업 며느리이자 재벌의 딸인 정혜의 옷깃이 스치면 나가떨어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정혜는 가장 어려운 복수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남편이 지원해 교육감 선거에 나가는 미숙의 남편을 낙선시키는 간접적인 방식이다. 여성인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정혜의 남편은 더 강한 가부장성을 가지기 때문에 복수하기 더 어려운 목표가 된다. 가부장제에서 재생산이 불가능한 여성이 어떻게 취급받는지를 생각하면, 정혜의 불임 또는 난임은 정혜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겉보기에 가장 정상적인 가정에 살고있는 미숙의 경우도 복수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고아출신인 미숙은 자신이 힘들게 얻은 '정상가정'을 자신의 복수 때문에 잃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정혜와는 반대로 자신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상대방의 가부장성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수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미숙은 끝까지 자신의 복수가 과연 옳은 결과, 즉 과연 정상가정 회복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고민한다. 정상가정 콤플렉스가 가장 심한 미숙은 자신의 행동이 자식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고민한다. 주취폭력을 일삼는 남편에게 폭력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택한 복수가 자신뿐 아니라 자식에게 악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가부장제에 희생되는 수많은 여성들이 고민했고, 고민하고 있고, 앞으로도 고민할 지점이다.

정혜와 미숙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가부장제에 도전하기 힘들어 한다면, 남편과 사별하여 가부장성에서 벗어나게 된 홍도는 가장 넓은 행동반경을 보여준다. 가부장성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자식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자식들을 각자의 개인으로서 존중하고, 동시에 자신도 개인으로서 존중받고 있다. 홍도는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는 캐릭터가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복수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은 카페에서 홍도의 집으로 옮겨가게 된다. 세사람에게 가장 자유로운 공간, 그리고 자신들의 움직임이 침해받지 않을 공간이 바로 홍도의 집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당연하게도 가부장성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홍도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홍도도 위계질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자식에게 고통을 준 아이의 부모에게 복수를 꿈꾼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복수의 내용을 비밀로 하고 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또는 '부모는 자식에게 그래야 하기 때문에' 홍도가 지고 있는 짐을 생각하면,

* 한계점이 분명한 복수의 끝

 그렇게 고민하고 준비했던 일들이 으레 그렇듯이, 주인공들의 복수는 다소 싱겁게 끝이 난다. 교육감 선거 유세현장에서 정혜의 남편이 바람 피우는 현장을 찍은 영상이 공개된다. 그리고 가부장성이라는 환상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하지만 이 장면이 통쾌한 이유는, 흔히 말하는 '몰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몰카의 가해자는 보통 남성이고, 피해자는 보통 여성이다. 2016년에야 남성피해자 신고접수가 최초로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기사로 전해졌다. 하지만 여성 피해자는 그 전부터 훨씬 많은 숫자가 존재해왔다. 하지만 남성의 몰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조심좀 하지'정도의 이야기가 오갈 뿐이었다. 그러나 <복자클럽>에서는 몰카의 피해자-가해자 역전을 통해 복수를 완성하고, 남성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와 가부장성 모두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겸의 생부는 몰카가 공개되어 곤란을 겪는다. 사회적으로 매장된다거나 하는게 아니다. 곤란이다.

그러나, 복수가 소소했던 만큼 이 사건이 세상을 바꾼다거나, 세상 모든 가부장제를 파괴했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저 홍도, 미숙, 정혜 세명이 가부장제에서 조금은 벗어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그들이 꿈꾼 복수가 해낸 일이다. 복수의 대상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한달정도 시끄럽던 세상은 조용해졌고, 미숙 남편의 교육감 후보 사퇴 정도, 정혜가 남편에게 이혼선언을 한 것 정도가 가장 큰 사건이었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복수가 가지는 한계점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에겐 각자 싸워야 할, 또는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다. 어쩌면 너무나 가까워서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우리를 억압하는 어떤 존재, 사상 또는 이념들이다. 때문에 나의 복수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 방법이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세 주인공이 싸웠던 가부장성과 사회의 부조리는 서로 다른 모양이었고, 서로 다른 모양의 부조리를 깨는데는 서로 다른 세명이 힘을 합쳐야만 했다. 때문에 우리는 연대하고, 힘을 모으고, 서로 토론하고 신뢰해야 한다. 그 결과는 너무나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꿀수 없을지도 모르고, 내 주변도 제대로 바꾸지 못한 채 나만 격리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복자클럽>에서 결국 문제를 해결했던 건 정혜 남편의 혼외자인 수겸이었다. 계획과 달리 정혜 남편의 몰카를 틀고, 마지막 순간에 미숙에게 그만둬도 좋다고 말한 사람은 수겸이다. 수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였다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세 주인공의 복수가 가능하도록 한 핵심적 인물이다. 기성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복수를 다음 세대의 가부장이 될 남성인 수겸이 완성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수천년을 공고히 지켜왔던 가부장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일수도 있지만, 수겸이 만약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흔한 남성으로 자란다면 결국 이런 노력은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결국 가부장제에 의해 혜택을 보거나, 최소한 피해를 덜 보고 있는 남성이 주체가 되었다는 점도 현실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우리는 수겸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복자클럽>은 그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수겸이 어떻게 자라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들을 뿌리치고,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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