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동물학교> 엘렌심, 네이버, 연재중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종족의 한계일수도 있겠고, 인류가 쌓아온 역사의 한계일수도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환생이라는 개념이다. 동양에서 환생은 일종의 업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덕을 쌓으면 인간으로 환생하거나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이다. 때문에 흔히 윤회/환생은 사람들을 체제에 복무하도록 유도한다. 악업을 쌓으면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동안 민간신앙에 자리잡은 이런 개념은 우리 일상의 곁에 자리잡고 있다.
엘렌심 작가가 네이버에서 연재중인 <환생동물학교>는 이런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가치중립적으로 환생을 바라본다. 사람도, 동물도 모두 환생이 가능한 대상일 뿐, 일단 환생의 대상이 되면 종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환생의 대상으로 적합해야 한다는 조건은 있지만, 이건 인간으로 환생하는 존재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동물의 본성을 지우고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반을 맡은 선생은 인간인 것을 보면 다른 종족으로 태어날 선생들은 각각의 종족에 맞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처음에 질문을 던지고 시작한다. "착한 동물들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꼭 그런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고,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종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즈막하게 이야기한다. 이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 받아들이는 인간의 특성들을 통해 나타난다.
흔히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서로 연대하는 고등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생각보다 많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서로 무리를 짓고, 상관없는 다른 종족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만의 특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특징이 무엇이길래, 환생동물학교 AH-27반의 동물들은 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앞서 말한 인간의 조건만 따지면 웹툰 <환생동물학교>의 주 무대인 AH-27반의 친구들은 이미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서로 다른 종인데도 불구하고 사이좋게 지낸다. 하지만 이 동물들은 아직 꼬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이유중 하나는 주인에 대한 그리움이다. 하지만, 주인을 잊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꼬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건 완전한 이유로 보기에 불충분하다. 주인을 만나고 온 맷의 꼬리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풀릴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뭘까?
답에 대한 실마리는 새로운 등장인물인 판에게 있다. 판은 강아지가 아니지만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자신이 강아지라고 주장하는 악어다. AH-27반에서는 모두 그를 강아지라고 받아들여 주지만, 가장 인간에 가까워 보였던 블랭키는 판의 어디가 강아지냐고 따진다. 그러던 블랭키가 판을 받아들이게 되는 건, 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다.
수조 밖에서 자유로워 보였던 강아지를 동경했던 판에게, 블랭키는 강아지도 새로운 수조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걸 해결하는 것이 꼬리를 없애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조금 더 인간의 본질에 닿아있는 말이다. 인간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존재다. 현재 살고 있는 인류의 대부분은 플로피 디스켓을 쓰던 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쓰는 지금까지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다른 동물들이 도구를 사용하고 무리를 지어 사회를 이룬다고 해도,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거나 거기에 적응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본질은 변화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로 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로 환생을 준비하는 '꽁치 친구'는 반대의 경우다. 오히려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지만 간절히 원하고 있다. 바로 이 꽁치 친구의 등장으로, 작품이 조금 더 특별해진다. 변화가 인간의 본질이라면, 왜 꽁치 친구는 순식간에 변하지 못했는가? 그건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우리는 흔히 동물로 태어나는 것은 현생에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생동물학교에서 환생은 말 그대로 삶을 바꾸는 것이지 형벌이 아니다. 꽁치 친구는 AH-27반의 동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급속도로 변화한다. 인간에서 꽁치로 태어나는 것이 자신의 삶(또는 죽음)에 의한 형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AH-27반의 친구들은 자신이 동물일때 가지고 있던 습성을 바꾸기를 어려워한다. 몇가지는 순식간에 바꿨지만, 동물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들은 버리기 어려워하고 있다. 주인에 대한 사랑이나 집착, 인간이 쓰는 도구에 대한 두려움, 뼈다귀 같은 것들이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보다 두려워하는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서 말한대로 판은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이 특별해지는데도 큰 몫을 하고 있다. 판은 자신이 강아지라고 주장하는 악어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아마도 교장이나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흰색-검은색 개는 서로 논쟁을 벌인다. 흰색 개는 '판이 스스로 강아지라고 했으니 강아지'라는 쪽이고, 검은색 강아지는 '다르면 상처받는 세상'이라고 반박한다.
우리는 이런 차별을 눈앞에 두고 모른척하며 살아간다.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살아가는 정체성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존재를 지운다. 앞서 인간의 본질은 변화지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또다른 본성이 있다고 말했다. 인간 중심의 사고를 더 잘게 쪼개면,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 된다. 이 두가지가 합쳐지면 인간은 '나'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된다. 때문에 나와 다른 또다른 '나'는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고, 거기서 벗어나는 인간은 집단의 이름으로 응징한다.
판은 자신이 강아지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강아지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 때문에 괴로워할수도 있었지만, AH-27반의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강아지로 받아들이고, 진흙에 뒹굴고 공을 던지고 물어오게 하는 등 강아지의 삶을 알려준다. 처음엔 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블랭키는 '강아지의 삶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말한다.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차별로 이어져선 안된다. 그렇게 생각했던 블랭키가 판과 오해를 풀었던 건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인간은 어떤가? 일본의 삿포로시에서 동성 파트너쉽 제도화가 논의되던 때, 담당자에게 800건이 넘는 반대의견이 투고되었다. 그러자 담당자는 "당사자들은 이런 편견 속에서 살고있는건가"하는 자각과 함께 더욱 제도화를 위해 힘썼다고 한다. "바로 그렇기에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반면, 우리나라에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로 아직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창구조차 없이,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바로 관점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흰 개의 입장은 '본인이 정했다면 우리가 해줄 것은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입장이고, 검은 개의 입장은 '상처받을 본인을 위해 존재를 지우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소수자를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그들을 '인정'하거나 '응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한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이다. 인간은 변화에는 빠른 적응을 보일지 몰라도, 다름을 인정하기는 어려워한다. 검은 개의 말 속에는 그런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소설가 배명훈은 '우리나라는 다름을 억압하는게 아니라 다름을 응징하는 나라'라고 일갈했다. 앞서 말했던 '환생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체제에 복무하고,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으면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할 것이라고 겁주는 것은 다름을 응징하는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다름을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동물들의 모습과, 그것이 상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검은 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를 비춘다. 이건 우리가 '변화'해야 할 지점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듯 하다.
<환생동물학교>는 엘렌심 작가의 두번째 작품이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의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가며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름에 대한 차별, 혹은 응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작품을 보는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모든걸 계급화하고, 그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인간이라면, 과연 환생동물학교에 들어갈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