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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Apr 26. 2018

불행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나의 삶

<그날의 히요>, 글/그림 히요, 도움 우리, 핀치, 연재중

          일본 드라마 중에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작품이 있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일종의 계약결혼을 주제로 주부의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등, 인기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헝가리 속담이라는 작품의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사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망치기 힘든 것이 있다. 나의 삶 그 자체다. 


          <그날의 히요>는 히요 작가가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스물네살에 졸업식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서른살의 자신이 찾아가 “2년정도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서른인 지금은 엄청나게 예쁜 세살짜리 아들이 있다. 그리고, 이혼해서 남편은 없으며 담뱃값은 두배가 된다”는 암담한 소식을 전하는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한다. 히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한번에 독자들에게 던진 다음, 작가는 ‘히요’의 삶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졸업식 꿈을 꾸는 히요. 현실의 자신이 찾아온다.

          프랑스의 철학자 엘렌 식수(Hélène Cixous)는 저서 <메두사의 웃음>에서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식수는 남성적 언어와 사고구조를 비판하며 이항대립적 사고를 통한 인식을 거부했다.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의 경험을 통한 글쓰기로 탈이분법적, 비결정적인 글쓰기 스타일로 대표되는 개념이다. 미리 정해진 ‘올바른’ 구성법이나 선형 추론(linear reasoning)등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에 저항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웹툰에서, 특히 생활툰에서 두드러진다. 


           만화계 또한 식수가 비판하는 이항대립적 사고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과 일본의 만화계는 크게 소년만화 – 순정만화로 구분할 수 있다. 소년만화는 대중적인 것으로, 순정만화(소녀만화)는 여성들의 것으로 인식된다. 가부장적 사고체계에서 남성적인 것은 긍정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여성적인 것은 부정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데, 만화에도 이것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웹툰의 시대가 열리면서 자기고백적 서사를 담은 생활툰이 인기와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2010년대에 가장 인기를 많이 얻은 생활툰 작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서사의 완결성이나 명징함 보다는 답을 얻기가 요원한 고민과 질문이 주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이어지더라도 3편 내외로 짧게 마무리되는 생활툰은 에피소드가 점으로 구성되어 선을 이룬다. 구성면에서도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적합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초반 인기를 얻은 생활툰들의 작가가 여성이긴 하지만 그들이 ‘여성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시대적 분위기도 있었겠으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삶을 내세우기보다 ‘젊은 도시인의 삶’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다음에는 부부의 삶, 애견인의 삶과 같은 장르의 세분화가 일어났다. 여성의 삶이 생활툰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최근에서야 육아-출산경험을 그려내는 웹툰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 육아-출산 웹툰의 경우는 흔히 말하는 ‘정상가정’내에서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날의 히요>는 이혼한 후에 부모님과 함께 아이를 키우는 젊은 도시 거주 여성을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독자들이 작품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히요의 삶’이지, ‘아이 엄마 히요’가 아니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만약 이 작품에서 기존의 미디어에서 그렸던 억척스럽게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젊은 어머니상을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그리 주목할만한 작품이 아니었을 것이다. 히요는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날의 히요>의 작품 속 세계를 나누어보자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히요, 개인으로서의 히요, 사회인으로서의 히요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작가이자 등장인물인 히요를 이룬다.  

기본을 하는 곳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은, 그들이 '기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히요는 고양이를 키우고, 아들을 키우며 부모와 함께 살지만 자신의 삶을 놓지 않는다. 카페에서 일을 하고, 들어와서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도 고민한다. 이 해로운 세상을 먼저 살았던 사람으로서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삶을 고민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그날의 히요>는 육아만화가 아니다. 보통 웹툰의 형식에서 생활툰-일상툰에는 테마가 있다. 육아 웹툰, 음식/요리 웹툰, 최근에는 반려동물툰까지 등장했다. 이 작품에도 테마는 있다. 다른 일상툰과의 차이가 있다면, <그날의 히요>는 사람들이 흔히 불행할 것이라고, 또는 특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일상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작가이자 주인공 히요와 같은 인물은 ‘실패자’로 여겨진다. 전통적 미디어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여성의 이미지는 억척스러움이나 희생적이라는 키워드로 그려진다. 그 때문에 그의 일상은 앞서 말한 키워드 안에 갇혀버린다. 그들을 가두고 실패자로 낙인찍는 것은 가부장제다. 


           히요는 본인의 삶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음 속에 작은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의 트라우마들을 가두어 놓았다.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14화 <별 일 없이 산다>편에 잘 나타나 있다. 히요는 한때 자신에게 붙은 낙인들을 의식하며 자기혐오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작가의 가슴팍에 붙은 낙인들은 이혼녀, 아들 딸린 30대 미혼모, 하나도 안 유명한 작가 같은 것들이다. 벗어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히요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을 실패자라고 낙인찍는 외부의 것들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자기혐오는 타인의 낙인으로 시작된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중에 하나는 아이를 키우며 작가가 느끼는 일상속의 차별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차 없이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마트를 자주 간다던가, 동화 속에 나타나는, 택시를 타고도 마주해야 하는 일상적인 혐오와 차별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차별을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일상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을 차별하는지를 보여준 다음 그 안에서 아들 톨이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적는다. 아이를 위해 밤새 동화책을 골라내고, 평소같았으면 싸웠을 택시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식이다. 해결방법은 없다. 차별을 해체하고 파악할만한 추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작품에는 여성의 경험만이 드러난다. 


           2018년, 우리에게 필요한 만화를 꼽으라면 이 작품을 꼽겠다. 요즘에는 기존의 미디어들도 다양한 ‘정상가족 내’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날의 히요>는 그 틈바구니에서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포맷인 웹툰의 생활툰이라는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렸다.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들어맞는 이야기를 그리는 이 작품은 특별하다. 작가가 그리는 만화는 특별할지라도, 타인이 붙인 낙인으로 인해 불행해지거나 특별해지지는 않을, 결코 도망갈 수 없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작가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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