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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Jul 05. 2018

함께라서, 견뎌나갈 수 있는 시간들

<식탁 아래 Blue>, 글 마대, 그림 매봉, 저스툰, 연재중

    국제보건기구 WHO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 전 세계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병중 3위가 우울증이었다. 뿐만 아니라 203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앓는 질병으로 우울증을 꼽는 예측도 같은 곳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미 100명당 13명이 앓고 있다는 우울증은, 이제는 특별한 사람만이 앓는 질병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와 관심이 필요한 생활질환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때문에 우울증을 비롯한 질환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웹툰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이라하 작가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시선으로 환자들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종범 작가의 <닥터프로스트>는 천재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정신질환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닥터 프로스트의 주인공은 본인도 질환을 앓고 있지만) 이 두 작품은 ‘질병을 꿰뚫어보고 치료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매봉 작가와 마대 작가가 협업해 만든 <식탁 아래 Blue>는 오히려 당사자로서 우울증을 겪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어 신선하다. 이 작품을 처음 보면 요리만화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은 원룸에 살며 직접 요리를 하고, 친구와 함께 캔맥주와 함께 밥을 먹는것을 삶의 낙으로 삼는다. 대학 동기인 주인공 은예와 맑음은 주말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또 맛있는 것을 함께 먹는 친구다.

직접 요리를 만드는 주인공 은예

    <식탁 아래 Blue>는 단순히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만을 편집해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요리만화라기엔 레시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이들이 해먹는 요리도 화려한 요리라기 보단, 일주일에 한번 먹는 자취생의 특식 정도로 생각하는게 좋은 간단한 레시피가 대부분이다. <식탁 아래 Blue>라는 제목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음식보다, 그 아래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은예는 일을 하다가 번아웃 증후군으로 인해 무기력함과 우울감에 시달리다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현재는 카페 '선샤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을 쉬고 있다. 그리고, 극도의 우울감에 집에서도 거의 나오지 못하던 그 때, 마찬가지로 일에 지쳐서 퇴근을 하고 있던 대학 동기 맑음을 만나게 된다. 은예의 모습은 딱 보기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지만, 맑음은 은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음은 반가움에 은예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저녁을 해먹는 주말의 시작이었다.

은예를 처음 만난 맑음의 모습

    맑음에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은예가 말을 잘 안하는 성격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서로 깊은 이야기보단 가벼운 이야기만 주고 받던 어느날, 맑음은 은예에게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고 이야기를 한다. 대학 동기들끼리 오랜만에 만나서 밥이나 먹고, 술이나 한잔 하자는 이야기. 그러나 은예는 나가기를 망설인다. 고민 해 보겠다고 말하는 은예에게, 맑음은 이렇게 말한다. "집에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 알바에는 미리 안된다고 말했으면 좋겠어."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당한 은예는, 맑음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게 과연 맑음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맑음은 은예가, 자신과 친구인 은예가 우울증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격이 원래 저래서, 사람들을 피하는 성격이라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단순히 살펴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그럴리 없다는 맹목적인 믿음 때문일수도 있다. 내 주위에는 그런 '특이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 때문일수도 있다.

은예는 우울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100명중 13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 주위에 우울증은 이미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제는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식탁 아래 Blue>는 맑음과 친구들을 통해 그 '인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작품이 의미있는 점 중 하나는 주인공 은예의 우울이 뿌리깊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풀어낸다는데 있다. 우울증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사고 같은것이 아니다. 은예의 삶 속에 오래도록 숨어있는 요소들이 우울감을 만들어냈고, 은예가 그것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될 때 까지 주위 사람들은 물론 은예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었을 뿐이다.


    은예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은예 본인조차도 우울증인지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은 우리가 우울증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깊은 무력감과 불안, 그리고 우울감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배웠다. 의지가 부족해서, 심성이 유약해서 같은 말들을 들어오며 자랐고, 또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우울감을 '인정'하는 것 부터 큰 장벽이 된다.

'내가 이상한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우울감이 과연 개인의 책임일까? 은예의 경우는 정규직이 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죄책감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흔히 모든 문제를 미세하게 파고들어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곤 한다.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면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명확해지고, 그 사람만 제거하고 나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결고 그런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은예 뿐 아니라 은예의 친구 미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라는 예쁜 외모 때문에 대학 시절부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건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자신에게 집적거리는 남자들이 과연 미라의 탓일까? 미라의 외모를 보고 다가온,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서 업무와 사적 감정을 결부시킨 사람들이 미라의 커리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미라에게 있다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집적대던 남자는 순정남이 되고, 미라는 '어장'을 한게 되었다.

    <식탁 아래 Blue>는 "너의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흔히 하는 위로의 말을 직접 전하기보다, 은예의 삶과 미라의 삶,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맑음의 삶을 그림으로써 위로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 사람이 가지는 공통점, 즉 20대 여성의 삶이 있다.


    세 사람은 모두 죽을만큼 힘들게 살아내고 있지만, 그것이 삶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내지 못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은 세 사람 모두 지겹도록 겪었다. 맑음의 경우는 '사무보조'가 되기도 했다. 거래처 사람이 사무보조라고 부르는 말에, 남성 상사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차별은 사람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또 그렇게 낮아진 자존감은 제대로 자신을 보살필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빛나는 것이 이 세 사람의 연대다. 맑음은 자신이 은예에게 쏟아냈던 말들을 미라에게 전했고, 미라는 즉시 은예를 찾아가자고 말한다. 자신이 겪어본 일이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살아냈던 삶이기 때문에 미라는 맑음의 실수를 이야기 해주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맑음에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따뜻한 포옹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점이 바로 여성간의 연대다. 삶이 증거하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소리내어 하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미라는 은예에게 일장연설로 태도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 반찬과 밥을 챙겨놓고 매끼 챙겨먹고, 사람도 만나고 하는 일들을 '함께 해보자'고 말한다.


    미라의 이런 말은, 우울증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개인의 유약함으로 문제를 치환해버리기보다, 그 개인과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텅 빈 공감과 위로보다, 함께 먹을 밥을 차려놓는 것이 낫다. 밥을 먹고, 또 다음 끼니까지 버텨나갈 힘을 기르고, 또 내일을 살아갈 즐거움을 얻는 것. 그게 식탁 위의 일이라면, 이 작품은 식탁 아래의 우울함을 이겨나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답이 없어 보이는 늪에서, 빠져나올 용기가 되어주는 것.

    미라는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놓으며 은예의 용기가 되어주었다.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고, 서로의 내일에 대한 기대가 되어주는 것. 이 작품이 빛나는 이유는, 콘크리트처럼 혐오와 차별로 덮여있는 세상에서 민들레처럼 꽃을 피우는 연대와 이해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에서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 절망을 헤쳐나갈 용기가 되어주는 <식탁 아래 Blue>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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