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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Aug 14. 2018

품격있는 어른을 만나기란

 이 글을 쓰고 있는 며칠 전의 일이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 선생이 소천하셨다고 했다.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나는 선생을 잘 모르고, 그의 칼럼이나 책 정도를 찾아 읽은게 전부지만 왠지 마음이 허했다. 몇 년 전부터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품격있는 어른이 있다는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가 고민중인 것들을 먼저 고민해본 사람이 풀어내는 자신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는 큰 힘이 되었고, 또 위로가 됐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줄 아는 어른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황현산 선생은 칼럼 <간접화의 세계>에서 구의역 사건과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민중 개돼지론’을 이야기 하면서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과 나향욱들이 만날 수 없는 이유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선생은 서사의 구조에서 우리는 주인공에 낭만적 자기투사를 하지만, 하인과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스크린도어(안전문)를 보지만
그 뒤에서 죽어가는 젊은 수리공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최근 만화계에는 여러가지 이슈가 있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여기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나도, 턱없이 적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목소리를 낼 위치에 있는 사람과 실제로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간에 몇 개의 관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면이 없다는 이유를 들 수도 있다.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면, 주로 목소리를 내는 건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 작가들이었다. 생계가 걸려있는 문제에서 그 젊은 작가들은 동맹휴재를 선언하거나 작품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위로 올라가면 스크린도어 너머의 사람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다는 듯 말을 아꼈다.


 그들을 위한 변명을 한번 해 보자. 스크린도어를 통과한 사람은 플랫폼 너머가 너무 위험하다고 항의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밖으로 떨어져 나갈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가장 밑바닥부터 올라온건 자신도 똑같은데, 왜 지금 저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경쟁에서 도태되는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나는 살아남았다고. 맞는 말이다. 그들도 살아남은 것뿐이다.


 간혹 잔인했던 90년대 말의 이야기를 듣는다. 만화책 시장이 붕괴했고, 대여점마저 문을 닫던 시절. 그 시기를 이겨낸 작가들의 에고를 접할 일이 가끔 있다. 그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버텨낸 자신들을 밀어낸 웹툰이 미웠던 것인지, 웹툰은 만화가 아니라는 비난을 쏟아내곤 하는 모습을 가끔 접할 일이 있다. 그 혐오의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는 너무나도 투명해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도전을 한 작가들이 있었다. 바뀐 시장에 패배를 선언하고, 자신들이 가진 무기로 새롭게 도전하겠다는 선언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 중에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김성모 작가다. 2000년대 인터넷 밈(meme: 인터넷상 재미난 말을 적어 포스팅한 그림, 사진. 소위 “짤”, “짤방”)의 대표주자였던 김성모 작가는 연재중에 비판을 받고 초심을 찾겠다며 소셜미디어에 각종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자신이 웹툰을 연재하는 ‘요즘 애들’보다는 그림과 클래스 있는 만화를 만드는 능력에서는 앞선다고 말하거나, 공사판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찍어 올리며 초심을 되찾겠다는 말을 하는건 구리지만 ‘아저씨’니까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재를 시작한지 한달이 채 안된 7월 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김성모 작가의 작품이 <슬램덩크>등의 유명작을 트레이싱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트레이싱은 원작 그림 위에 종이를 놓고 베끼는 작업을 말한다. 작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뎃생맨이 되고싶어서 슬램덩크를 30권정도 베낀 적이 있다. 어느덧 손에 익어서 이후 작품에서 비슷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확인해보니 독자들이 의심할 정도로 똑같았다. 시정하고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풍은 뇌보다 손이 가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글을 맺었다. 


 다시한번 품격있는 어른이 얼마나 만나기 어려운 존재인가 떠올렸다. 김성모 작가의 변명은 다시 황현산 선생을 떠올리게 했다. 선생은 2017년 칼럼 <풍속에 관해 글쓰기>에서 노년기에 접어든 남성이 남성 위주의 세상을 비판하며 자신을 그 안에 포함시켜서 통렬하게 반성하는 모습은 놀라웠다. 그래서, 김성모 작가의 변명이 씁쓸했다.


 김성모 작가의 사과를 요약하면, 자신이 너무 열심히 하다보니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게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마침 <슬램덩크>의 서태웅이 한 말이다. 그리고, 서태웅이 해야 멋진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태웅이 아닌 김성모가 한 그 말은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렸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풍전고의 에이스이자 에이스 킬러, 남훈에게 반칙을 당해 눈이 가려진 서태웅이 하는 말이다.

 결국 8월 2일, 네이버 웹툰에서는 공지사항을 통해 김성모 작가의 작품에 타 작품과 유사한 점이 발견되었다며 연재/서비스 중단을 알렸다. 동시에 저작권 보호에 경각심을 가지고 작가들의 개성있는 창작 컨텐츠 제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만화계에 트레이싱이 문제가 된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림에 자신이 있으니 그림으로 승부하겠다는 작가가 단 몇화만에 트레이싱이 문제가 되어 연재가 종료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중견 작가는 더더욱 그렇다. 


 다시, 스크린도어 너머에 있는 김성모 작가의 모습을 본다. 그는 나름 유명한 작가로 커리어를 쌓아왔다. 작가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중은 살아온 세월의 두께에 대한 값이 아니다. 그가 삶으로서 증거해낸 것들에 대한 많은 시선중 하나일 뿐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아직까지 그걸 배우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배워야 할 소양이다.


그러나 단지 이번 사건을 통해 김성모 작가가 표상으로 떠올랐을 뿐, 그 아래에 있는 수많은 침묵들을 보면서 만화계에 과연 존경할만한 동료, 선배, 어른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데뷔 작품을 연재하고 두번째 작품 연재에 실패하거나 포기하는 작가의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 부당한 계약과 플랫폼의 갑질은 점점 수면위로 떠올랐다. 주간연재의 살인적인 스케줄은 이미 해묵은 논제가 됐고, 웹툰 제작에 필요한 비용은 작가의 몫이 되었다. 마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라는 시가 생각나는 침묵이었다. 판이 좁다는 변명이 언제까지 이곳에 품격있는 어른을 밀어내고 지워낼지 두렵다. 무엇보다, 이 침묵이 가장 두렵다.


 품격있는 어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제 좀 피부로 와닿고 있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걸 알고 있지만, 야속한건 어쩔 수 없다. 스크린 도어 너머에서 죽어가는 젊은 수리공에게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을 만나는 일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이 만화계에서는 정말 기대할 수 없는 일일까. 하다 못해,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걸까.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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