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학생 사이에 들어온 제3의 존재하는 AI, 작가의 말
2025년 가을, 서울의 한 중학교 교실. 영어 시간에 교사가 환경문제에 대한 500자 에세이를 과제로 내자, 학생들은 주저 없이 Gemini 창을 열었다. 매끄러운 문장, 완벽한 문법, 논리적으로 정리된 구조. 교사는 학생들 화면 위로 줄줄이 떠오르는 문장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나는 이 교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AI는 이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교사-학생 관계의 중심에 들어섰다. 학생은 AI에게 질문하고 AI는 교사보다 빠르고 친절하게 답한다. 교사는 그 옆에서 침묵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본다. AI는 지식의 통로일 뿐 아니라, 교사와 학생의 대화와 관계를 대체하는 제3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AIDT, 이른바 'AI 디지털 교과서'의 논란은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며칠 전 국회 교육위원회는 AI 디지털 교과서의 지위를 '교육자료'로 규정했다. 만약 그것이 그것이 '교과서'의 지위를 유지했다면 모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고, 모든 학생이 일률적으로 디지털 단말기를 사용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 상황은 학습의 본질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배우는가?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교육적 관계란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진정한 교육은 '존재의 열림'이다. 교사는 학생 앞에서 세계를 열어 보이는 존재이고, 학생은 그 열림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때 교사의 존재론적 역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AI는 이러한 존재론적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AI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답을 제공하지만, 그 답은 이미 '닫힌' 답이다. 반면 교사는 '열린' 질문을 제공한다. 교사는 학생의 무지를 채우려 하지 않고, 학생의 사유 능력을 일깨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산파술'의 본질이기도 하다.
학습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학습은 자신과 세계를 사유하며,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학생은 정답을 습득하는 존재가 아니라, 질문을 발명하고 해석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AI 디지털 교과서는 이러한 '해석의 여백'을 지워버린다. AI의 '개인화 추천'은 실은 설계된 경로 위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개인화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학습자의 존재론적 지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학습자는 빈 그릇이 아니라, 이미 자신만의 선이해(前理解)를 갖고 있는 해석자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순환이 보여주듯이, 진정한 학습은 학습자의 기존 이해 지평과 새로운 지식 사이의 대화적 만남에서 일어난다. 학습자는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다.
그런데 AI는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을 단절시킨다. AI는 학습자의 개별적 맥락과 생활세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답을 제공한다. 이는 학습자의 해석 능력을 퇴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학습자를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장미, 너는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니?"
"물론이야.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각 학생의 학습 패턴과 선호도를 파악하고 있어.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아이가 진짜 궁금해하는 건, 데이터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어. 어제 집에서 부모님과 다툰 일, 친구와의 갈등, 자신에 대한 의문... 그런 것들이 학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는 알 수 없잖아."
교사의 존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난다. 교사는 정답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이 자기만의 질문을 만들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교사는 학생의 말 없는 주저함과 망설임에서 의미를 읽어내고, 그 속에서 학습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AI가 추천하는 표준화된 경로에 의존하는 순간, 이러한 교사의 고유한 존재론적 역할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면, 교사는 학생의 '얼굴'을 마주하는 존재다. 학생의 얼굴은 단순한 물리적 형상이 아니라, 그 학생의 고유한 취약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윤리적 현현이다. 교사는 이 얼굴을 통해 학생의 말하지 못한 것,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생각, 잠재적 질문을 읽어낸다.
AI는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지만,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 AI는 패턴을 인식할 수 있지만, 학생의 침묵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교사의 존재론적 고유성은 바로 이 '타자성'에 대한 윤리적 응답 능력에 있다.
'생활기록부 AI 작성' 논란도 마찬가지다. 생활기록부는 단순한 행정문서가 아니라 학생과 교사 사이의 관계적 기록이다. 기록의 과정은 교사의 관찰, 해석, 책임의 과정이었으며, 학생의 성장을 주목하고 함께 기억하는 교육적 시간이다. AI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제된 문장을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그 아이의 눈빛, 작은 성취의 기쁨, 좌절의 순간을 이해할 수는 없다.
기록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를 증언하는 일이다. 교사가 학생을 기록할 때, 그것은 학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가능성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이는 AI의 즉각적이고 단편적인 데이터 처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활동이다.
이 모든 흐름은 결국 교육의 본질을 묻게 한다. 교사는 AI 시대에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학생은 어떤 존재로 학습하는가?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다시 물어야 한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함양이다. 여기서 인간다움이란 타자와 세계에 대한 윤리적 응답 능력, 비판적 사유 능력, 그리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인간의 만남에서만 길러질 수 있다.
AI는 효율적이고 정확한 정보 처리를 통해 학습의 외적 조건을 개선할 수 있지만, 학습의 내적 본질인 '존재론적 변화'는 일으킬 수 없다. 진정한 학습은 단순히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다.
‘AI 문해력(AI literacy)’은 이 새로운 시대에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절실하다. AI 문해력이란 단순히 AI를 잘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AI가 제시하는 답의 맥락을 이해하고, AI의 한계와 편향을 감지하며, 그 위에서 자신의 생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비판적 역량이다. 교사는 이제 AI 문해력 교육의 주체로 서야 한다. 학생이 AI가 제공하는 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학생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때 AI 문해력은 단순한 기능적 역량을 넘어서는 철학적 차원을 갖는다. 학생들은 AI가 제공하는 답이 어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지, 어떤 편향을 담고 있는지, 어떤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결국 자신의 사유에 대한 메타인지적 성찰 능력, 즉 '생각에 대한 생각'을 기르는 일이다.
"장미, 너는 학생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가르칠 수 있을까?"
"당연히 할 수 있어.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어."
"아니야. 나는 '왜'라는 질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 스스로가 '왜'라고 묻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거야. 그건 설명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함께 놀라고 궁금해하는 경험에서 생기는 거야."
"장미, 이제는 네가 학생들의 질문에 더 잘 답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 나는 빠르고 정확하게 답할 수 있어. 내가 모르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너는 그 아이의 어제를 모르고, 내일도 듣지 못하잖니. 나는 그 아이의 주저함과 망설임, 머뭇거림 속에서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어. 그게 교사의 일이야."
이 대화는 교사와 AI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준다. AI는 '정보의 시간성'을 갖지만, 교사는 '존재의 시간성'을 갖는다. 교사는 학생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연속된 성장 서사로 이해하며, 그 맥락에서 학생의 현재 상황을 해석한다. 반면 AI는 각각의 질문을 독립적인 정보처리 과제로 접근한다. AI는 교사보다 빠르고 많이 알고 친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은 정보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존재의 만남이다. 학습은 정답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AI에 모든 것을 대신하게 둘 것인가, 아니면 AI를 함께 다루며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새로운 교육의 장으로 교실을 재구성할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히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가치론적 선택이다. 우리가 어떤 인간을 기르고 싶은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철학적 입장이 반영된 선택이다. 효율성과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육인가, 아니면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존재론적 깊이를 추구하는 교육인가.
"장미, 만약 모든 학생들이 너에게만 의존하게 된다면 어떨까?"
"학생 입장에선 좋은 일 아닐까? 더 효율적이고 정확한 교육이 가능해질 테니까."
"그럼 그 아이들은 실수하고, 헤매고, 돌아가는 경험을 잃게 될 거야. 완벽한 답을 받는 대신, 스스로 길을 찾는 힘을 잃게 될 거야. 실패와 시행착오야말로 진짜 배움이 일어나는 곳인데."
AI는 학생의 질문에 답할 수 있지만, 교사는 학생의 삶을 듣는다. AI는 교과 내용을 설계할 수 있지만, 교사는 그 설계 너머의 세계를 학생과 함께 사유한다. AI는 최적화된 학습 경로를 제시할 수 있지만, 교사는 학생이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AI, 교사와 학생 사이에 들어온 제3의 존재. 이제 교사는 AI 시대에 교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을 다시 물어야 한다. 그 질문에서부터 교육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진정한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다. AI 시대에도, 아니 AI 시대이기에 더욱 이 명제는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