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민교육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대체가 아닌 상호 보완

우리의 과제는 둘 모두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

by 교실밖


최근 한국 사회의 담론에서 흥미로운 전환이 감지된다.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공화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지식인 사회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1987년 이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성취를 자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절감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한 다수결의 횡포, 포퓰리즘의 위험, 공동체 의식의 약화, 공적 영역의 파편화 등이다. 이 같은 경험과 문제의식 속에서 일종의 해법으로 공화주의를 호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화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에선 한국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은 확보했으나,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공적 가치는 실종되었다고 본다. 선거는 치러지지만 공론장은 파편화되었고, 권리는 주장되지만 책임은 희석되었으며, 참여는 증가했으나 덕성은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체감하는 바,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의 의지를 집계하는 기제로 전락하면서, 소수자 보호도, 장기적 공익도, 제도적 안정성도 위협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공화주의적 전통(법의 지배, 견제와 균형, 시민적 덕성, 공공선에 대한 헌신)을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은 충분히 이해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이 담론이 내포한 이분법적 구도를 우려한다.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로'라는 명제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해석하고 두 개념을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를 권리의 언어로, 공화주의를 의무의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각 속성이 갖는 가치를 손쉽게 재단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담론이 부상하는가?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특수한 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민주화를 성취했지만, 그것은 주로 권위주의 체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부정의 정치'를 통해서였다. 무엇을 함께 이루어갈 것인가 보다 무엇에 반대할 것인가가 정치의 동력이었다.


절차적 민주화는 빠르게 달성되었지만,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시민성과 제도적 성숙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형식적 절차로, 공론장은 진영 대결의 장으로 협소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지점에서 공화주의라는 개념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먼저 두 개념이 강조하는 바를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는 주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 평등한 참여를 중심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주권의 주체이며, 그들의 의사가 정치적 정당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반면 공화주의는 공동체의 공적 이익, 시민적 덕성, 법의 지배,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장치를 강조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로 이해되며, 이는 제도와 법, 그리고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보장된다.


여기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가 '누가 결정하는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공화주의는 '어떻게 결정하는가'와 '무엇이 결정되어야 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민주주의가 권리의 언어로 말한다면, 공화주의는 덕성과 책임의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두 개념을 대립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위험하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고착화한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이나 선거 제도로 환원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상의 풍부한 전통을 외면하는 일이다. 아테네에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늘 공동체적 참여와 시민적 덕성을 그 핵심으로 품어왔다.


듀이가 말했듯,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부의 형태가 아니라 ‘공동생활의 방식’이자 ‘소통되고 공유되는 경험’이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권리와 참여를 통해 사회의 에너지를 생성한다면, 공화주의는 그 에너지가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균형과 절제를 제공한다.


나아가 분리적 사고는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가두는 것을 넘어 공화주의를 탈맥락화한다. 역사적으로 공화주의는 민주적 요소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고대로부터 현대 정치에 이르기까지 공화정은 어떤 형태로든 시민의 참여와 동의를 전제했다. 민주적 토대 없는 공화주의는 귀족정이나 과두정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아울러 민주주의의 다음 경로로 공화주의를 사고하는 흐름은 현실 정치에서 잘못된 처방을 낳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공화주의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자칫 민주적 참여의 확대가 아니라 엘리트주의적 제한으로 귀결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는 현실적 위험이다. ‘전문가 중심의 숙의’, ‘제도적 견제 강화’,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이라는 명분 아래, 오히려 일반 시민의 정치 참여가 미성숙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매한 대중을 현명한 시민으로 교화하려는 계몽주의적 오만으로 빠질 수 있으며, ‘성숙한 시민’이라는 기준 자체가 누가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를 가르는 배제의 논리로 작동할 위험이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심화가 아니라 후퇴다.


본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반드시 공화적 가치를 품는다.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시민들은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권력은 제도를 통해 견제되어야 하며, 자의적 지배를 막는 방편으로 법치가 작동해야 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공화주의의 핵심 요소이지만, 동시에 건강한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지배가 아니라, 공동선을 지향하는 시민들의 자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헌법재판소는 대표적인 공화주의적 장치다. 다수의 결정이라도 헌법에 위배되면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이 헌법재판소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제정하고 승인한 헌법으로부터 온다. 마찬가지로 시민의 감시와 참여가 없다면, 법치는 공허한 형식으로 전락한다. 법이 권력을 제어하려면, 그 법을 감시하고 적용을 요구하는 시민의 능동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공화주의는 민주적 정당성 없이 온전할 수 없다. 공적 이익이란 누가 정의하는가? 시민적 덕성의 내용은 누가 결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민주적 과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공화주의가 엘리트주의나 권위주의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시민 주권과 평등한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원칙 위에 서 있어야 한다. 현대의 공화주의 이론가들이 강조하는 '비지배 자유'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때만 실현 가능하다.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로'라는 구호가 환기하려는 문제의식은 정당하고도 시의성이 있다. 그러나 두 개념의 대립 구도로 담론을 설정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한다.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상호보완적 질서다. 민주주의가 무질서로 흐를 때 공화의 원리가 필요하고, 공화주의가 권위주의로 기울 때 민주주의의 활력이 다시 그것을 견제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대 공화주의'가 아니라, 공화적 가치로 풍성해진 민주주의,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공화주의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적 공간의 복원은 민주적 평등과 공화적 탁월성이 만나는 곳에서 가능하다.


개념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적 순수성보다 복합적 실천을 요구한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은, 각각의 개념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두 개념 모두를 그 고유한 풍부함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협소한 정의의 감옥에 가두는 우를 범하게 된다.


좋은 체제는 민주주의이면서 동시에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공공선, 시민적 덕성, 제도적 견제와 같은 공화적 가치를 민주주의 안에서 실현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를 넘어 다른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87년 이후 우리가 지향해 왔던 과제를 완성하는 일이 아닐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AI 시대, 인간의 역량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