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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비토크

어쩔수가없다

스포 없는 영화 감상기

by 교실밖

어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았다. 바로 감상문을 쓰지 못했던 것은 해명되지 않는 몇 가지 얽힌 실타래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사회적 메시지는 비교적 분명했고 모든 것을 잃은 중산층의 절망을 다루는 방식도 이해한다. 극장을 나서면서 느낀 건, 내가 기대했지만 즉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의 부재, 혹은 결핍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박찬욱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기대가 있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그만의 독특한 영화 스타일, 정밀하게 설계된 서사, 떡밥을 던지고 회수하는 쾌감... 이번엔 그게 없거나 약했다. 그래서 묘하게 허전했다. 물론 감상자로서 내 수준에도 원인이 없다 할 수 없다. 주연급 배우가 다수 조연급으로 등장했음에도 박찬욱 감독이 만들었다는 그 사실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영화를 입체적으로 보지 못한 내 탓일 수도 있겠다.


재취업의 잠재적 경쟁자를 살해한다는 동기를 보자. 우리 사회가 그 지경까지 왔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건 영화 속 이야기 아닌가. 아직 일할 나이의 중년들의 상실에서 오는 절망의 크기도 알고, 내가 꼭 원하는 일이 있을 때(혹은 그 일에 내 마음이 온전하게 붙들려 있을 때) 경쟁이 얼마나 살벌한지도 알겠다. 특히 AI 시대에 '종이'가 갖는 물성 운운할 땐 감정이입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극 중 만수가 '꼭 그래야만 했을까', '그 방식밖에는 없었나'. '정말 어쩔 수가 없었나'라는 의문이 성가시게 따라다녔다. 십분 양보하여 인과관계나 동기를 인정한다고 해도,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장면에서 그 선택까지 가는 동안 감독은 나를 충분히 납득시키지 않았다.


박찬욱의 전작들을 떠올려본다. '올드보이'의 복수, '아가씨'의 사기극, '헤어질 결심'의 불가능한 사랑... 이 영화들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영화 내부에서 촘촘하게 제시했다. 관객은 그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를 느꼈다. 내 불평은 이번엔 그런 빌드업이 약했거나 의도적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배경은 있는데, 그것이 이 특정한 인물의 특정한 선택으로 이어지는 필연적 구조는 느슨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그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예술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 그런데 박찬욱이라는 이름 앞에 이 대답은 좀 의외다. 그가 늘 치밀한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가 지금부터 영화 만드는 방법에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치의 느슨함을 영화적 여백으로 치환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의 전작들에서도 열린 결말이 있었다. '헤어질 결심'도 명확한 설명 없이 끝났지만 영화가 만들어낸 스타일리시가 그것을 충분히 커버했다. 관객이 용인했다는 이야기다. 관객에게 해석을 맡긴다는 것과, 영화가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 부분을 관객의 상상에 위임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석의 여지가 남은 것이냐, 서사의 헐거움이냐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은 관객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 안에 있다.


내가 너무 여지없이 접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박찬욱표 재미'를 기대하는 것은 불순한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것이 본시 무엇을 말하느냐만큼이나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던가. 사회적 무게가 있는 주제일수록 오히려 더 정밀한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감상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나.


이번 영화에는 내가 기대했던 박찬욱 특유의 그 장치들이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서사, 예상을 뒤엎는 반전, 숨겨진 실마리를 찾아가는 쾌감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가 늘 똑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다. 60대 거장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의도된 변화인지, 아니면 사회적 메시지의 절박함이 영화적 숙고를 압도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관객과 감독 사이에는 일종의 약속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명시적인 계약은 아니지만 관객의 기대 안에는 그런 것이 있다. 다시 말해 특정 감독의 이름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기대의 깊이와 폭이 분명 있다. 그 기대가 어긋날 때, 그게 좋은 어긋남인지 실망스러운 이탈인지 구별하는 건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감독에게 과도한 걸 요구한 건지, 아니면 이번 영화가 정말 그의 기준에서 느슨했던 건지. 사회적 현실을 다룰 때 영화적 정밀함을 기대하는 게 불경스러운 건지, 아니면 감독이 남겨둔 동기의 여백을 내가 따라가고 있지 못한 건지.


확실한 건, 이 불편함을 내가 계속 끌어안고 있다는 거다.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처럼. 다음 박찬욱 영화를 볼 때까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질문과 함께 있을 것 같다. 내가 반복하여 '어쩔 수가 없다'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에서 감독의 의도는 일단 통했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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