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리시에서 전인적 발달과 시민교육을 향한 여정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빛나야 한다>를 읽은 독자들은 수호믈린스키라는 인물에 대하여 '대단한 사람', '극단적으로 헌신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실천을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렇게 인식할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작하자마자 아내의 참혹한 죽음을 대하는 수호믈린스키의 분노와 승화 과정이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고, 책 전반에 넘치는 그의 실천은 아이들을 향한 교육자의 사랑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분명 수호믈린스키이고 다른 모든 이야기들은 그를 중심에 놓고 보조 장치처럼 여겨지는 대목들도 꽤 많다. 말하자면 그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했고, 그의 실천은 평범함을 뛰어넘어 다른 학교에서는 도저히 따라 하기 힘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수호믈린스키를 더욱 특별한 교육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옮기고 고쳐 쓴 내 생각을 말하자면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빛나야 한다>는 한 사람의 영웅적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호믈린스키의 삶과 교육 실천은 마사 누스바움이 강조하는 '서사적 상상력(Narrative Imagination)'을 현실에서 구현한 모습을 보인다. 서사적 상상력이란 간단히 말해 내가 타자의 입장이라면 느끼게 될 감정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타자의 감정에는 기쁨과 슬픔 외에도 고통, 연민, 두려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다. 이를 타자의 가능한 입장에서 공감하고, 내가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를 상상하는 마음, 이것이 서사적 상상력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개인이 가져야 할 마음은 '감수성'이다. 수호믈린스키는 그 자신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의 교육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바로 아이들 한 명 한 명(Each One)의 감수성 계발이었다.
서사적 상상력이 개인의 감정에 머문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에너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사 누스바움이 여기에 더하여 사회적 참여(Social Participation)를 덧붙이는 이유이다. 사회적 참여는 타자에 공감한 사람이 정의로운 방식으로 그 사태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상황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인식하고 문제 사태를 발견하며, 그 사태에 적절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가운데에서 진전한다. 나는 여러 글을 통해 민주적 절차를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를 운용할 시민의 소양을 길러야 한다고 말해 왔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답답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들이 관련 법령이 부재하거나 절차가 없어서 풀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입법, 사법, 행정을 다루는 사람들의 민주적 소양, 참여하는 시민들의 소양만큼 발전한다.
말하자면 수호믈린스키는 사회주의 종주국 구 소련에서 서사적 상상력과 사회적 참여 방식을 고민했고 이를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책 말미에 '전인적 발달과 시민교육'이라는 말로 덧대어 설명하였다. 수호믈린스키의 전인적 발달론은 전통적인 지덕체 교육에 노동교육과 예술교육을 포함한다. 특히 노동교육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요소들에 관계하는 통합적 덕목이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내가 말했던 공식이 있다.
전인적 발달=조화x{(지덕체+예술)x노동}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인적 발달의 구조를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다섯 가지의 전인 발달 요소는 독립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노동을 통해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전인적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로운 발달이다. 나는 이 책의 글머리에서 교육기본법2조(교육이념)를 소개하였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요컨대 우리 헌법이 현대 시민국가보다 후진적이어서, 관계 법령이 부실해서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역량이 있어야 함은 물론 민주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유지하고 운용해 나가는 '시민들의 소양'이다. 수호믈린스키가 말하는 전인적 발달은 서사적 상상력과 사회적 참여를 말하는 누스바움의 주장과 매우 닮았고, 우리 교육기본법과도 비슷한 결과 맥락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수호믈린스키는 이를 자생적 혁신학교라 말할 수 있는 파블리시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했고, 우리는 굳이 말하자면 그저 이해충돌의 장으로 민주주의가 축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수호믈린스키는 걸출한 영웅으로 추앙받아 마땅할까. 다시는 수호믈린스키 같은 교육자를 만나는 일이 힘든 것일까.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영웅적 일대기를 그린 극적 서사에 불과한 걸까. 독서 초심자의 느낌은 그럴 수 있다. 모든 텍스트 읽기는 작가 혹은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에 동화하는 순서로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나 주인공의 입장에 공감하는 것에 머물면 이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독서이다. 그다음 순서가 있다. 독자 자신의 입장에서 재음미하는 것이다. 일종의 해석 과정이다. 이 과정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독자가 가진 경험에 따라 더 풍부하고 깊게 자기화된다.
이 책은 위인전도, 영웅담도 아니다. 교육을 개선하고자 했던 한 교육자의 생각과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의 실천은 철저한 공부와 임상을 바탕으로 지적 허영과 주먹구구를 완전하게 벗어나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주장했던 전인교육의 핵심은 모든 전인적 발달 요소들의 통합과 조화였고, 각 개인의 사유와 실천의 통합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에 비하여 교육의 물적 토대와 사회 분위기, 교육에 대한 관심 등 모든 것이 훨씬 풍요롭다. 서사적 상상력과 사회적 참여, 전인적 발달과 시민교육은 시대를 관통하는 교육 권고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면, 전인적 발달은커녕 암기 주입식 지식교육을 포기할 수 없는 구조와 풍토를 가지고 있다면, (사실 우리 교육에 대한 비관과 절망은 여기에서 비롯하지만) 교육 개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교육에 관한 한 좋은 합의의 경험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런 기대를 하기 힘들며, 따라서 각자도생의 풍경이 지속된다면 이 절망은 앞으로도 오래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수호믈린스키는 한 학교를 '자생적 혁신학교'로 만들었다. 그가 가졌던 권한은 오늘 한국의 교장들이 가졌던 권한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수호믈린스키는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공부했고 실천했다. 그의 서사를 만든 것은 파블리시라는 학교 공간과 마을, 그리고 구성원들이 견지했던 강한 '동료성'이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시사점은 수호물린스키 개인의 탁월함을 넘어 교장의 역할, 학교 구성원의 강력한 동료성, 250시간 이상의 부모교육를 결합하여 이뤄진 전인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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