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법의 획일화는 가르침과 배움을 넘어서 폭력에 가깝다
오늘의 교육 21호(교육공동체 벗)에 '배움의 공동체 운동의 확산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라는 제목으로 이혁규 교수가 글을 썼다. 이 글의 대부분에 동의하면서 나도 좀 보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선 이교수는 일본에서 형성된 배움의 공동체 방식이 한국에서 크게 확산된 이유를 몇 가지 들고 있다.
우선 두 나라의 공교육이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처음 이 모델이 들어왔을 때 경기도(이우학교)에서 작게 시작됐지만, 경기도의 수업개선 운동과 맞물리면서 경기도교육청의 공식적인 후원(?) 속에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수업의 계획부터 실행, 그리고 평가회에 이르는 전 과정이 상세하게 매뉴얼화된 일종의 프로그램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 모델의 위험성도 잊지 않고 지적하고 있다. 역시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예컨대 교실의 좌석배치나 도약과제의 제시, 연결 짓기, 되돌리기 등 매우 세세한 차원의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런 통일적인 지침의 일률적 적용은 이 운동을 하나의 도그마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또한 수업협의회에서 전통이나 권위자의 의견을 따르는 것 등 배움의 공동체 속에는 일본의 문화와 전통이 깊게 관련돼 있으며 이것을 도식적으로 따르는 것을 경계하자고 말한다. 동시에 수업을 성찰하는 방식도 획일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배움의 공동체 모델에 대한 의미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리 현실에 맞는 체계화된 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 이런 프로그램을 창의적으로 실천할 각성된 교사들이 필요하다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 여기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경험과 의견도 보태고자 한다. 졸저 <교육사유>에서도 지적한 바 있거니와 한국의 교사들이 수업 방식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념화가 있다. 배움의 공동체를 적용한 수업에 대하여 수업컨설팅을 의뢰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때 컨설팅의 방식은 이른바 '수업평가회'를 통하여 이뤄진다.
몇 번의 수업평가회에서 내가 느꼈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수업방식' 자체에 대한 평가가 금기시되는 경향이었다. 즉, 왜 이 수업방식이었나? 다른 방식을 적용할 순 없었나? 이런 평가는 암묵적으로 제외되었으며 이 방식을 얼마나 잘 적용하였나? 잘못 이해하였거나 잘못 적용된 부분은 어디인가? 와 같은 점들에 초점을 두었다. 방식 자체는 의심과 회의의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이 모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규범과 한국 교사들의 방법에 대한 과잉 신념화가 만나서 생긴 현상이었다.
지나친 미시 관찰은 수업행동을 '학습자의 배움이 일어나는 세밀한 양태'에 집중하여 분절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동안의 수업이 지나치게 교사 중심으로, 큰 개념 중심으로 이뤄졌던 것에 대한 반성이자 역작용이라 생각되는데, 마치 일본 야구를 보는 것 같은 정교함과 세밀함이 사전에 약속한 대로 조심스럽게 흘러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 수업방법의 창안자 사토 마나부는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하여 대규모의 강연회를 갖는다. 이 분은 수업 비디오를 보고 관찰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데, 어느 모둠에 속한 어떤 학생이 어떤 장면에서 배움이 일어나고 또한 주춤거렸는지를 말할 때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럼 강연을 듣는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나온다. 청중들에게 그 모습은 곧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요, 좋은 수업은 그곳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으로 전이된다. 그러면서 아마도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방법에는 권위자에 대한 복종 문화가 자연스레 생기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형태로도 꽤 전해 들었다. 한국 교사들끼리 수업협의회를 할 때도 그분의 '말씀자료'는 기준이 된다. 그러면서 이 방법을 적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질서와 유대감을 형성한다.
난 사실 수업방법을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의 유익함보다 수업 맥락을 이해하는 것의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런 측면에서 이교수가 말했던 '우리 현실에 맞는 체계화된 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 역시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체계화된 프로그램 속에서 학습이 더 잘 일어나는 것은 맞겠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반드시 어떤 '방법과 절차'를 통해서만 일어날까?
배움의 공동체를 넘어서는 일은 단지 하나의 모델을 극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배움의 공동체라는 말로 표상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서 '절차와 방법을 정하는 일 자체'를 넘어서는 시도라야 한다. 그 방법이 아이들 중심이라 해서, 혹은 민주적 절차를 포함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배움이라 할 수 있을까?
내 결론은, 그것이 배움의 공동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라면, 응당 의심과 회의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해체와 재구성을 경과하면서 그 자신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들었던 사례 중의 하나는 배움의 공동체 방식 적용을 둘러싼 구성원 간의 갈등이었다. 획일적으로 적용할 것이냐, 아니면 각자의 선택에 맡길 것이냐를 둘러싼 진통들이 있었고 심한 경우 헤어짐(전근)으로 갈등을 마무리했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어떤 방법을 획일적으로 써야 하다니... 그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빙자한 폭력일 뿐이다. (2014년 7월 25일)
댓글 토론 확인 https://www.facebook.com/younggi.ham/posts/738370872871295
[읽기자료] 수업방법의 과도한 신념화를 경계함 http://eduict.org/_new3/?c=1%2F23&p=6&uid=51234
처음 배움의 공동체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수업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 시도된 이우학교에서 이 방법은 잘 맞았다. 아마도 이우학교의 특별한 학교 여건, 학생들, 교사들 여러 요인도 이 방법의 성공을 도왔을 것이다. 그 후 경기도를 중심으로 이 방법이 급속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최근 이 방법을 놓고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는 분들이 배움의 공동체는 '방법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한다.
'방법이냐 철학이냐'를 두고 논하는 것도 우습지만, 제가 배움의 공동체 관련 여러 문헌과 강의, 그리고 수업관찰 및 평가회 등에 참여하면서 살펴본 바 사토 마나부 교수는 듀이의 철학을 따르고자 하는 분이다.(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언급하고 있고) 내 느낌에 이 분이 듀이에게서 민주적 시민성, 경험의 재구성... 등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문제는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업장면의 세세한 절차와 규범'을 정하려고 한데 있다. 그리고 가능한 세세한 규범이 있을 때 더 편안하게 적용하는 한국 교사들의 특성, 사실 이는 동아시아 쪽의 특성이기도 하며 특히 한국과 일본 교육의 유사성이다. (이혁규 교수의 글, '배움의 공동체 운동의 확산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의 교육 21호 참조)
이 방법을 실천하는 교사들이 이 이 방법은 절대로 '수업 매뉴얼'이 아니라 하나의 '수업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많은 학교에서 모든 교실에서(많은 혁신학교의 경우 최소한 한 학년에서 통일적으로) 적용해야 할 모델로 정하고 시행하였다. 놀랍도록 비슷한 수업과 평가회가 각 교실에서 각 지역에서 일어났다. 사토 교수 자신도 한국에서 이 방법이 이렇게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이것이 철학이냐 방법이냐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또한 듀이의 철학을 제대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냐에 관해서도 토론의 여지를 남긴다. 듀이가 말하는 민주적 시민성을 제대로 실천하는 방식이냐에 대하여 나는 의문을 가진다.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 수업과 평가회의 절차를 세세하게 정하고 그것을 따라주기를 요청하기 때문에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본령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서근원 교수는 2011년 국제혁신교육 심포지움 토론문 <배움의 공동체'는 학교 혁신의 길이 될 수 있는가?>를 통하여 좀 더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배움의 공동체에서 제시한 수업 관찰 방식과 수업 평가회에 대하여 교사들은 그 이전 한국의 교실의 지배했던 논리실증주의와 행동과학적 모델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또 경쟁과 성적 위주의 학습방법으로부터 협력과 표현 중심으로 옮겨가자는 주장 역시 꽤 설득력이 있다. 활동적 배움, 표현적 배움, 협력적 배움, 반성적 성찰 등도 결국 사토 교수의 독창적 철학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면 듀이에게서 영향받은 민주적 시민성, 경험의 재구성 등은 하나의 방법론으로 치환됐다. 좋게 말하면 듀이 철학의 창조적 변용이고 나쁘게 말하면 왜곡이거나 이탈이다. 그 외에도 나는 사토 교수에게 영향을 준 철학으로 세 사람을 더 꼽는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협력적 배움은 비고츠키에서, 표현적 배움을 아이즈너로부터, 반성적 성찰은 쇤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일부를 도입하여 배움의 공동체 모델의 철학적 근거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사토 교수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이 아니고 철학이다'와 같은 주장의 무의미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 본 많은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는 선생님들 역시 이것은 방법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초기에는 그런 말이 없다가 철학적 빈곤이라는 지적을 받은 후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아마도 배움의 공동체 연수자료에 그 말이 실리면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철학을 말하자 하면서 여전히 자신이 경험한 방법의 우수성과 효과를 통하여 나를 설득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향, 예컨대 공공성, 협동성, 동료성 같은 것은 철학인가? 내가 보기에 아직은 선언적으로 들린다. 사실 이 같은 지향은 이미 100년의 듀이가 더 근원적으로, 풍부하게 이야기해 놓은 것들이며, 그 외에 비고츠키나 아이즈너, 쇤의 견해가 방법 속에 적용된 것이다.
어떤 방법도, 심지어 어떤 철학도 우린 그것을 만나는 순간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 특히 수업에 적용되는 특정의 방법은 아이들의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대한 성찰 속에서 개별 교사가 실천해야 할 각각의 것들이다. 듀이나 비고츠키, 아이즈너, 쇤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물론 그들은 수업 지침을 세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개의 교사들이 아이들과 만나서 이뤄야 하는 맥락적 과정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려 있다. 이른바 철학을 구현한다는 그 방법이랴 말로 뛰어난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마주하는 교사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린 그것에 믿음을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교사들의 손에 딱 쥐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불신이 오히려 교사들의 수업 퇴행과 절차 의존적 사고를 불러온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것은 토론인가? 그렇다면 불편함과 서운함을 내비치기보다 서로 이야기하면 된다. 그 방법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비판의 통로를 열어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