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육학의 저주와 재앙(?)
노학자는 '미국 교육학의 저주와 재앙'을 주 텍스트로 하고, 그동안 썼던 글을 '증보자료' 형태로 덧붙여 책의 제목을 '미국 교육학의 정체'라고 정해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제목만 보아도 우리 교육에 영향을 준 미국 교육학의 나쁜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나쁜 영향'이라 함은 교육을 경험한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교육의 나쁜 영향 중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효율성 강조, 과학적 교수기법, 실용적 지식의 추구, 행동적 학습목표의 명세화... 등등 본인의 경험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미국 교육학의 나쁜 영향과 우리 교육의 특성이 기능적, 수단적으로 조합하여 경쟁 만능주의, 학벌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 같은 재앙을 낳았을까. 다만 확실한 것은 해방 후 미군정기 때부터 들어온 미국식 교육과 한국 교육의 만남은 그 강점끼리 만났다기보다, 취약점끼리 만나 70년간 증폭돼 왔다는 것이다.
"미국 교육학은 헤르바르트가 말한 교육학의 두 가지 기초 학문 중에서 심리학을 주축으로 하면서 윤리학과 심리학을 각각 따로따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교육목적 없는 교육방법'과 '교육방법 없는 교육목적'을 모색해 왔다."(41쪽)
이런 판단은 이후에 저자의 생각으로 기술될 '심성함양'이 지식과 행위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논변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피터스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중시하는 사람이며 반드시 이 목적과 내용(교육을 왜 하는지? 교육의 과정에서 무엇이 전수되는지?)이 관통할 하위 개념으로 교육방법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교육학의 저주와 재앙을 논증하기 위해 첫 번째로 불려 나온 사람은 타일러다. "타일러의 견해를 지칭하는 '교육과정 이론'에서 '이론'은 다소 예우적인 호칭이며..." (3쪽) 이 말은 저자가 '이론(아는 지식)'의 위상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상징하는 말이다. 그는 타일러가 1949년 발표했던 '교육과정과 수업의 기본 원리'를 소개하면서, "이 책은 마치 사람의 인품이 그러하듯이, 책의 영향력이나 생성력은 외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모범적으로 예시하는 듯하다"(8쪽)라고 말한다. 타일러의 저작에 '이론'이란 말을 붙여주는 것조차 '예우'라고 하는 것과 이 말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맞다. 이는 칭찬의 말이 아니다.
"외관상으로 보잘것없는 이 책이 막강한 영향력과 생성력을 행사하며 전 세계를 통틀어 교육과정에 관한 사고를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에 속한다."(8쪽)
저자의 이 말은 한국 교육에 재앙을 가져온 미국 교육학의 나쁜 측면에 타일러가 내걸었던 네 가지 요소 1) 교육목표의 설정, 2) 학습경험의 선정, 3) 학습경험의 조직, 4) 평가에 대한 분노에 찬 지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타일러의 저작이야 말로 '이론' 축에 들기 힘든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므로 결국 타일러의 학문적 자양분이 누구로부터 왔는가를 추적한다. 예상대로 듀이다.
저자 자신도 "우리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듀이의 교육철학이 타일러의 모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21쪽)고 말한다. 저자는 그 논거로 듀이와 타일러가 같은 시기에 학문적 활동을 했기 때문이고,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이 어떤 식으로든 타일러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과, 타일러가 듀이가 재직했던 시카고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타일러가 듀이의 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동시대 활동, 같은 대학 재직만으로 단정하긴 성급하다.
타일러와 듀이는 8년 연구를 함께 수행했다. 8년 연구는 당시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붐을 이뤘던 진보교육이 중등 교육에서도 똑같이 효과적인지를 8년에 걸쳐 진행한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공동연구가 사실은 근거로는 더 적합한 것 같아 부연한다. 아무튼, 이런 것들만으로 타일러와 듀이의 사상적, 학문적 연관성을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양자가 추구했던 학문의 내용에서 단서를 잡는 것이 더 객관적인 접근일 것이다.
타일러가 1949년에 쓴 '교육과정과 수업의 기본 원리'는 그 이후 1957년 스푸트닉 쇼크를 겪으면서 브루너가 전면에 등장할 때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이어짐'을 규명하는 일인데, 이홍우 교수도 잠깐 언급하고 있지만 타일러가 교육목표의 원천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 타일러의 관심이 목표는 오로지 평가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에서 부분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스푸트닉 쇼크 이후까지 타일러가 건재했던 것은 자신의 지식관을 드러내지 않고 듀이-브루너의 경계선 어디에선가 줄타기를 하며 그저 목표와 평가, 그리고 그 사이에 학습경험의 선정과 조직(어떤 목표인지, 어떤 경험인지는 판단을 보류한 채)이 있다고 말을 한 것이 주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후 타일러는 블룸의 교육목표 분류학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메이거의 행동적 목표에까지 영향을 준다.
결국 타일러-블룸-메이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학적 교수기법주의와 학습에서의 효율주의 등이 한국의 중앙집권적 교육독점과 섞여 독특한 한국식 '경쟁 지상주의와 교육의 수단화'로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저자가 굳이 듀이와 타일러를 연결하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종 타깃을 듀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타일러-블룸-메이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학적 교수기법의 도입, 교육의 극단적 수단화가 한국 교육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저자는 그들에게 철학적 영감을 제공한 사람이 듀이였다고 확신한다. 이는 부당하고 무리한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듀이에게 있어 교과는 원래 있는 그대로의 교과가 아니라 그의 도구주의적 편견에 의하여 부당하게 변형되고 왜곡된 교과이며, 따라서 교과가 원래 있는 그대로 이해되고 전수되지 않는 것은 그의 견해가 몰고 올 - 사실상 이미 몰고 온 - 재앙 중에서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43쪽)
저자의 이 말은 듀이의 철학을 어떤 생각으로 조명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듀이를 진지하게 비판하고자 노력했던 저자의 학문적 활동을 크게 인정하는 편이다. 실제로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 번역서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이홍우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비판적 각주를 많이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듀이 사상을 객관적으로 전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학자적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재앙 속에서 교육과 교사는 때로 일방적인 피해자의 위치를 넘어서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바깥의 가해자들보다 더 가공할만한 가해자의 위치에 선다."(47쪽)
섬찟한 이야기다. 결국 이렇게 되면 듀이와 타일러,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국의 교육학자들, 그리고 현장의 교사들이 재앙의 주범 내지는 공범이 된다. 사실, 최근의 교육혁신 흐름은 과거 미국식 교육이 가져온 폐해를 극복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한편, 교육혁신의 큰 아이디어 역시 듀이로부터 온 것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미국 교육학의 저주와 재앙을 말할 때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한 두 사람의 학자로 지목하기는 얼핏 쉬워 보일지 몰라도, 근거와 팩트를 확인하는 일, 그 팩트와 종횡으로 연결됐던 한국의 여러 교육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