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회문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밖 Mar 06. 2020

마스크가 뭐길래

감염병 시대의 마스크 심리학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마스크는 추위를 막는 '방한용'이었다. 이름도 '방한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면소재로 두껍게 만들어 얼굴을 가리는 형태였다. 몇 번이고 세탁하여 쓸 수 있었다. 2009년 신종 플루가 유행할 땐 부직포로 얇게 만든 일회용 마스크를 주로 사용했다. 이때 썼던 마스크는 감염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용'이었다.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릴 때 쓰는 일회용 마스크 역시 '방어용'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마스크에는 미세먼지를 거르는 필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KF80이니 KF94라고 하는 것은 미세먼지를 80%, 94% 거를 수 있는 필터가 들어가 있는 것이란다. 모양도 좀 더 입체화됐고 가격도 비싸졌다.

최근 유행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병은 마스크 대란을 불러왔다. 언론에서는 연일 마스크를 사려고 길게 줄을 있는 시민들을 보도한다. 이를 보고 불안감이 커진 사람들은 서둘러 마스크를 사고, 혹시 품절될지 모른다는 마음에 또 사서 비축하는 일이 벌어진다. 급기야 정부는 마스크 유통을 통제하겠다고 나섰다. '마스크 5부제'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일주일에 두 장의 마스크를 사기 위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할 판이다. 고육지책으로 이해한다. 물론, 언론은 그 방침이 왜 문제가 있는지 또 기사를 쓰고 있다. 기사가 의도적으로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럴리야 있겠냐고 생각하지만 쏟아지는 기사는 그런 의심을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현재 코로나 19 감염병 상황에서 쓰는 마스크는 이중의 목적이 있다. 감염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어용'인 동시에 나는 당신을 감염시키지 않겠다는 '인증용'의 성격을 갖는다. 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쓰는 마스크는 지금까지 마스크 착용 동기와 사뭇 다르다. 일종의 사회적 기호다. 보통은 마스크를 쓴 사람을 경계하는데 요즘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경계한다. 만약 건강한 사람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탄다면 동승한 마스크 착용자를 대단히 불안하게 할 것이다. "이 시국에 어디 마스크도 안 쓰고 엘리베이터를 타?"라는 전도된 심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흐른다. 이 같은 집단 심리는 코로나 19 감염병 국면에서 전 국민의 마스크 착용을 일상화한다. 이 같은 풍경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에 의한 과잉 수요가 일어나면서 공급이 달리게 한다. 이것이 현재 마스크 대란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정부가 마스크의 생산과 유통에만 개입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개인위생 수칙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발열이나 기침 같은 징후가 있을 때는 외출을 삼가고, 불가피하게 외출을 하거나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질본 권고는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그렇게 되면 일반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사람과는 좀 더 특별하게 거리두기를 하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는 지금, 마스크를 쓴 사람이 쓰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상식적이지 않다.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 상황에서 마스크 착용이 상대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내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함인지는, 혹은 양자 간의 비중을 과학적으로 밝힐 여지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의 대부분은 미세먼지를 방어할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바이러스를 지녔을지 모를 나의 비말을 차단함으로써 타인을 보호하려는' 성격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여 내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행위는 타인의 감염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만에 하나 '내가 감염원과 접촉하였는데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를 과잉 가정한다.

만약 후자라면 전혀 이상이 없었던 당신이 지난 열흘 동안 착용하고 다닌 마스크는 타인을 위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마스크를 씌워 포괄적으로 안전을 인증하는 것보다 꼭 써야 할 사람의 징후를 명확히 제시해줌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타당하다. 물론 이미 징후가 드러났다면 더 확실한 방법은 자율 격리의 상태로 며칠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우엔 실내지만 가족 보호를 위해서라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확진자의 99%는 초기 발열이 있었다고 한다. 발열은 내가 마스크를 써야 할 타당한 징후이자 일차적인 자율 격리의 조건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발병한 사람들을 초기 증상과 진행경과, 중증 이행 등을 면밀하게 분석하면 발열 외에도 더 세밀한 징후들을 포착할 수 있다. 이는 의사결정 국면에서 '모든 사람은 마스크를 쓰세요'가 아닌 '이런 이런 징후가 있을 때 반드시 외출 금지 내지는 불가피한 외출 시 마스크를 쓰세요'라고 지침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만약 초기 대응을 이렇게 했다면 지금과 같은 과잉 수요로 인한 혼란과 비용을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대응했다면 꼭 마스크를 써야 할 사람이 마스크를 구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정책은 한정된 자원의 배분에 관한 선택적 의사결정이기 때문이다.  


전례 없이 마스크를 대량으로 소비한 까닭은 감염병 상황에서 온 '불안의 증폭'이었다. 그리고 불안을 증폭시킬만한 독특한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감염병 관리에 실패하고 있음을 최대한 부각하는 것, 여기에 마스크 대란을 소재로 쓰는 것이 독특한 상황이다. 다가오는 선거 시기는 서로 내편에 유리하고 상대에게 불리하도록 논리를 짜 맞추는 것을 일상화한다. 방어와 공격의 동기가 충분하다. 소문은 사실로 읽히고, 과장과 유통은 빠르게 경계를 넘는다. 


나는 이러한 정치적 공방이 현재 감염병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줄까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징후가 보이는 분들은 외출을 삼가거나 마스크를 쓰세요'라고 정부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언론은 정부가 어떤 대응을 하더라도 '정부 마스크 공급 대책 오락가락'이라 적을 것이 뻔하고, 이것은 또 다른 공격의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과잉 수요의 악순환은 이 공식을 따른다. 현재 마스크에 대한 과잉 수요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동기라기보다 상당 부분 심리적인 것이다. 


감염병 유행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철저한 개인위생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탈정치적' 접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후자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정치는 쉴 새 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탈정략적' 접근은 필요하다.



* 커버 이미지 https://www.ytn.co.kr/_ln/0115_202002271720534021

매거진의 이전글 감염병 상황을 견디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