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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pr 06. 2020

소통하는 신체

'결론이 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 인내력을 기르기 

지난 글에서 세계 각국의 코로나 19 현황을 데이터로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비극에 둔감해지는 인간의 심리에 대하여 말했었다. 언론에서도 중계하듯이 감염자 수, 사망자 수를 보도하면서 각국 현황을 비교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한국이 빠른 검진을 통해 확진자의 경로를 추적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하여 감염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해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이는 높은 관심은 그것대로 평가하여 마땅하다. 일본은 검진 수를 늘리지 않는 방법을 쓰다가 올림픽 연기 후 검진을 확대하여 현재는 확진자가 꽤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이를 두고 한일 관계의 적대적 프레임 속에서 "그것 봐라, 앞으로 폭발할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인가.  

브런치 글을 통해 <지성의 면모 
https://brunch.co.kr/@webtutor/60>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우치다 타츠루 교수를 소개한 것이 작년 7월이다. 당시 우치다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베를 일컬어 “책임을 지기보다 차라리 파국에 이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의 시각으로 보면 아베 정권은 “전후 일본의 모든 정부 중 가장 무능한 정부”이다. 물론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코로나 19 상황을 관리하는 방식을 보아도 (올림픽 성사라는 국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기 파괴적 상황 관리'라 볼 수 있는 점들이 존재한다. 우치다 교수는 '파국 욕망'이라는 개념을 들어 일본 정부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통하는 신체, 2019>에서 그는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지배한다는 전능감'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문화권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이 그렇다. 많은 일본인들은 '의료인이 질병이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환자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여기는 편이다. (소통하는 신체, 서문 5쪽)


다수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단독행동보다 생존전략상 항상 유리하다'는 것은 근대 이후(니체가 말하는 대중사회 출현 이후)에 지배적이 된 개념이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의 많은 부분은 이 '대중 사회의 행동 코드'와 '개인의 신체가 생존을 원해서 발신하는 신호 사이의 알력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책, 74쪽)

말하자면 일본 정부의 파국 욕망 내지는 자기 파괴적 상황 관리가 저항감 없이 일본 시민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일본 시민들의 자기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문화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우치다 교수의 용기 있는 발언 역시 한일 관계라는 고착화된 안에서 '자기 충족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우치다 교수의 말이 비단 일본 정부나 일본 사회를 향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은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성이 있다. <소통하는 신체>는 간단히 말하여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뭔가 유의미한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의미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구실로 언어와 주체가 태어나는 영광의 순간, 즉 인간이 인간이 되는 그 순간을 날마다 축하하고 있는 것이다.(34쪽)


인간은 혼돈에서 질서로, 파괴에서 재생으로, 꿈에서 각성으로 순환하는 여정을 날마다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존재이다. (42쪽)


<소통하는 신체, 우치다 타츠루 지음, 민들레>


앞에서 우치다 교수가 자신이 속한 '영역'에 대해 쓴소리를 던졌다는 이야기는 비단 일본 특유의 문화를 비판하고 싶은 욕구를 넘어 세계인이 갖는 보편성에 대한 성찰적 발언이다. 이는 우리가 한일 관계의 적대적 고착화를 극복하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적용되는 관계의 문제, 의사소통의 문제를 탐색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치다 교수의 교양관은 "잡학 퀴즈의 답을 1만 개 외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교양이란 쉽게 말하면 어떤 사실을 그와 다른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또는 어떤 사실을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다른 사실과의 맥락 속에 다시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121쪽)"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 인간은 '위험 상황이 자기와 상관이 없을 때'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 그것이 같은 본인과의 유기적 맥락까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불확실한 채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상황은 너무나 많으니 '애매모호함'에 익숙해지라고 권하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소통하는 신체>에서 우치다 교수는 영악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뇌의 신호에 기대기보다 당신의 몸이 주는 신호에 집중하라고 주문한다. 뇌에 쌓이는 어떤 정보도 몸을 경유하지 않고는 유의미성을 획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떤 화답이 지성의 면모에 다가서는 것일까. 우치다 교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고민이다.  

호흡, 리듬, 촉감 같은 텍스트의 신체성을 경유하여 이윽고 의미성에 다다르는 것이다. 훌륭한 텍스트는 그런 것을 경험하게 해 준다.(94쪽)... '결론이 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 인내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야기를 단순하게 해서 결론을 내리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고,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을 감내한다.(245쪽) 


책 정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7571249


* 책 안에서 인용구의 일부는 경어로 돼 있으나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평어체로 바꿔 기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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