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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an 10. 2021

일상의 힘

우린 다시 감염병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몹쓸 감염병의 창궐은 진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황사가 내려앉고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릴 때도 일 년 내내 마스크를 써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마스크는 '법적으로' 필수품이다. 마스크는 기호이다. 내 안전은 물론이고 타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신뢰의 메시지 같은 것이다. 자칫 깜빡 잊고 맨 얼굴로 나갔다간 신고를 당할지도 모른다. 벌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백신이 개발됐다는데 언제쯤 맞을 수 있지, 그것으로  정말 면역이 보장되는 것인지, 혹시 부작용은 없는지 지금으로선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우리 삶에서 이토록 불확실성이 컸던 때가 있었을까? 마스크를 쓰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공을 응시하는 우리의 눈에 불안함이 깃든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감염병이 종식된다 해도 그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힘들 것이라 한다.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실로 엄중하다. 우리가 그전에 누렸던 일상이란 과연 무엇이고, 우리 삶에선 어떤 의미였을까. 혹시 우리가 진부하거나 무료했다고 말하는, 때로는 지리멸렬한 그 심난한 삶 속에 일상이 있었을까. 먹고 마시고, 다투고 갈등하며, 화해하고 악수하는 소시민 적 삶 말이다. 그래서 절망스러울 때는 세상이 한번 뒤집어지길 열망했던 지금 여기의 삶 말이다.

그 미움과 사랑이 우리를 살아 있게 했고, 다투고 갈등하는 사이 우리의 심장이 뛰었다는 사실은 일단 인정하자. 심장이 뛰지 않는 상태야 말로 극단적으로 건조하거나 죽은 삶이지 않는가. 고된 일을 끝낸 사람들이 소주 한 잔에 위로받고, 만나고 이별하며 울고 웃는 삶, 대체로 우리가 겪어온 일상이다. 이런 까닭에 비록 지지고 볶는 생활일지언정 과거의 일상으로 다시는 돌아가기 힘들 것이란 말은 충격적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세상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두루 얽혀 작동한다. 감염병은 어떤 영역에서든지 우리네 삶을 비좁게 만든다. 정보를 얻는 방식을 바꾸기를 요구하고 타인과 관계하는 방식도 대폭 축소시킨다. 성마른 사람들은 미래사회가 성큼  앞당겨졌다고 말하고, 이제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감염병의 장기화는 미래사회 담론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마주 보고 관계할 수 없는 인간들은 네트워크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사회관계망에서 주고받는 이모티콘 하나에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는 사람들을 보라.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 안에 들어와 있는 디지털 인프라와 콘텐츠는 교육의 기본 문법을 바꾸고 있다.  

인터넷만 끊김 없이 작동한다면, 그리고 내 은행계좌에 잔고가 바닥나지 않았다면 우린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출입문을 열고 물건을 주고받던 택배 방식도 벌써 옛날이야기다. 재택근무와 비대면 택배는 타인을 전혀 만나지 않고도 먹고 마시며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감염병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는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바야흐로 인간의 삶은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일까.

모든 미래는 내 앞에서 현재화할 때만 의미가 있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그리는 것 모두를 사고하는 주체는 지금 여기의 '나'이다. 장밋빛 미래 역시 현재의 나와 너를 설득할 때만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가 된다. 기술은 우리 생활에 더할 수 없는 편익을 제공하지만 이 모든 위기를 기술이 해결해줄 것이란 믿음은 주관적이며 때로 위험하다. 다시는 옛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미래로 가는 일관작업열에 몸을 실어야 한다는 이 거대한 전환의 요구 앞에서 몇 가지 되물을 것이 있지 않은가.  


매우 역설적인 말이지만 도구가 가치가 있으려면 도구다워야 한다. 수단이 목적으로 치환될 때 종종 비극이 찾아온다. 모든 기술과 편익도 인간의 고유성과 존엄을 보장하는 기본적 사고 위에 설 때만 의미를 갖는다.  대면수업을 대신하여 원격수업이 활성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비대면 생활이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을 기술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음도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의 진화가 말해주듯 전환기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전환은 기술 위에서 편익을 누리는 자와 철저하게 소외되어 그저 사회보장으로 연명만 하는 사람들을 나눌 것이다. 다시는 옛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대체로 이런 경고를 전제한다.
 
미래사회는 어떤 시민을 요구할 것인가. 기술진화는 인간들을 더욱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하게 만들 것이다. 사회적 질서가 합리적 이성 아래 놓이면 지금보다 훨씬 좋을까. 공동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하게 될까. 따뜻한 공익은 가능할까? 간단하지 않은 난제들이 있다. 사회적 공리를 가져올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은 더욱 건조하고 차가운 심장을 요구한다.   

맞다. 다시는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에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렇듯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구성하는 미래 사회의 도래이다. 마주 앉아 상대를 바라보며 하는 대화와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부족한 감정을 이모티콘에 의존하는 대화는 다르다. 세상의 일이 '업무처리'하듯 진행되면 우린 그만큼의 무미건조함을 감당해야 한다. 합리성을 대가로 우린 더 많은 감정과 느낌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돈되지 않는 예술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작가 김훈은 수필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 커버 이미지 http://www.anjunj.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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