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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n 30. 2020

코로나 시대 놀이의 복원

코로나 블루 시대, 우정이 있는 학교를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 첫 질문은 학교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들여다보자는 것이고 이어지는 질문은 학교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활동에 관한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질문은 분리할 수 없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학교라는 장소에서는 '일어날만한 일'이 주로 발생한다. 정색하고 건조하게 말한다면 학교는 '학습, 일, 놀이, 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네 가지의 활동은 학교의 존재 근거이며 학교를 학교답게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학교의 기능 중 학습과 쉼은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학교이기 때문에 공부 없는 쉼은 생각할 수 없고 쉼 없는 공부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일(노동)'에 관해서는 이 글 말미에 내 의견을 보태겠다. 오늘은 '놀이'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자. 동네마다 아이들만의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골목'일 수도, 마을 '공터'일 수도, 방과 후의 학교 운동장일 수도 있었다. 아이들이 골목이나 공터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은 잠재 공간(potential space)으로 변모한다. 놀이를 위한 별도의 규칙이 적용되는 곳이 잠재 공간이다. 대체로 아이들은 몇 가지의 놀이와 함께 골목과 공터를 자신들의 세계로 만들었다. 어른들도 이 자리를 피하여 지나갔다. 아이들이 놀이를 위하여 그어 놓은 '선'을 밟는 어른은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아이들은 잠재 공간에서 놀이 규칙을 합의했고, 합의한 규칙을 지켜야 놀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또 하나의 '사회'였다. 이 소사회 안에서 아이들은 사회화되어갔다.

놀이는 필연적으로 몸을 부대끼고 머리를 쓰게 만들며 타자와 교섭하게 하는 과정을 담는다. 놀이 안에는 경쟁이 있고, 승자와 패자, 벌칙 등 현재의 사회를 반영하는 여러 장치들이 있다. 하지만 잠재 공간이라는 특성은 이 모든 것을 '합의된 절차' 속에 녹여낸다. 합의된 절차라는 말은 서로 '짰다'는 것이다. 놀이에서 진 것은 실세계에서 손실을 입은 것과는 다르다. 놀이에서 졌다고 우정에 금이 가거나, 이겼다고 해서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놀이는 연출자 없는 연극과도 같아서 모두가 주연이고, 스탭이며, 또한 관찰자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친구가 되고 우정을 쌓으며 성장한다. 다양한 놀이를 통해 몸의 균형을 잡고, 근육을 키우며, 이는 다시 일이나 공부의 에너지가 됐다. 공부나 관계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상당 부분 놀이를 통해 해소하였다. '놀아본 아이들'은 다양한 현실 상황에서도 대응 능력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며, 감정의 격동을 잘 조절한다.


그런데, 몇 개월째 몸을 부대끼며 놀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 19라는 감염병 탓이다. 코로나 19는 기본적으로 '사람 간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강제한다. 놀이는 밀접하게 닿을수록 재미가 배가되는 반면 코로나 19는 사람 간의 접촉을 차단한다. 외출을 자제시키고, 집안에 머물게 한다. 자칫 확진자와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강제로 '격리' 당할 수도 있다. 의심자로 분류되면 내가 지나온 경로를 추적당할 수도 있다. 만약 확진자라도 된다면 나와 접촉한 모든 사람들, 내가 속한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감염병이 지속되는 기간 중엔 여럿이 어울리는 '놀이'를 멈추어야 한다.

놀이의 입장에서 보면, 코로나 19 상황은 가장 엄격한 규칙이 지배하며, 규칙을 어겼을 때는 가혹한 형벌이 주어지는 게임이다. 규칙을 어기고 자유의지에 몸을 내맡기는 순간 질서를 깬 사람이 될 것이고, 주변으로부터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려 깊지 못한 사람으로 지탄받을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코로나 19라는 감염병은 사람 간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고, 놀이를 중단시키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감염' 상황에 대한 긴장을 조성한다. 이렇듯 감염병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코로나 블루'이다.

서울교육의 지표는 질문이 있는 교실, 우정이 있는 학교, 삶을 가꾸는 교육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가운데 우정을 쌓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정을 지탱하는 것은 '관계'이고, 관계를 형성하는 데 놀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놀이의 자유를 박탈해간 감염병은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집단적 우울증'에 빠뜨린다. '몸은 멀게, 마음은 가깝게' 하자고? 그게 과연 쉬운 일인가. 아이들이 집안에 장기간 유폐되는 상황은 우울증뿐만 아니라 자존감이 낮아지고 불안감은 높아지게 한다.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에게 '놀이를 복원'시켜주는 것이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는 길이다. 물론 감염병 시기에는 몸을 부대끼고 숨결을 나누는 놀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긴 해도 생활 속 거리두기를 바탕으로 몸을 움직이고, 친구와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며, 신체 각부의 발달과 균형을 높일 수 있는 놀이는 해야 한다. 그러한 놀이가 많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감염병의 장기화로 인해 우울증에 빠진 아이들은 심리 치료를 받기 전에 이 같은 간단한 놀이만으로도 우울감과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 초록우선어린이재단이 전국 초4~고2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코로나 19 이후에 하루 수면시간과 공부시간이 각각 41분, 56분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평균 미디어 사용 시간은 무려 2시간 44분이 늘었고 운동 시간은 21분이 줄었다고 한다. 데이터는 '놀이의 실종'을 말하고 있다. 자칫 만성적 우울감으로 고착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장기적 재난의 시간에 할 수 있는 놀이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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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학교의 기능을 학습, 일, 놀이, 쉼이라 주장했다. 이중 일(노동)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학교가 아이들이 일하는 곳이냐라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다. 일(노동) 교육은 사실 전인적 발달을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노동교육은 지식교육, 신체교육, 도덕교육, 예술교육 각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며 이들과 조화를 이룬다. 나는 우리 교육의 큰 병폐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부터 일(노동)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삶을 천시하면서 가능한 일은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몰두하는 데서 온갖 부작용이 생긴다. 대학입시가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사교육이 창궐하는 이유 역시 적게 일하고 돈은 많이 버는 직업을 얻기 위함이 아닌가. 듀이, 수호믈린스키, 이오덕 모두 어렸을 때부터 노동에 노출되는 것, 생산적 노동에 참여하는 것, 일의 성과와 기쁨을 나누는 것을 교육의 중요한 과정으로 삼았다. 학교는 수공노작과 실천적 생태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몸을 움직여 타인을 기쁘게 하는 노동교육을 확대해야 한다.  



* 커버 이미지 https://www.kidsnfm.go.kr/nfmkid/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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