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기기에서 리셋(reset)은 '재설정'을 말한다. 컴퓨터와 같은 기기를 사용하다가 먹통이 되는 경우에 스위치를 껐다 다시 켜는 것만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면 대개 기기 사용 중에 쌓였던 여러 흔적들을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물론 문제의 근본 원인까지 제거할 순 없다. 그럴 땐 이른바 '공장초기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예 공장에서 처음 출시됐을 때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리셋이나 공장초기화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생도 리셋을 하거나 처음 태어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초기화할 수는 없을까.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한 번쯤 해 봤을 법한 상상이다. 나 역시 부인하지 않겠다. 삶이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 후회스러운 일이 많을 때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왜 들지 않겠는가. 내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보란 듯이 살아보겠다... 단적으로 말하여 이런 생각은 그저 상상을 즐기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당신이 느끼는 삶의 진부함이 바로 우주를 유지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인생 리셋이나 초기화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아야 세상의 질서가 유지된다. 그저 살던 대로 조금 더 충실하게 살면 된다. 이 별것 아닌 처방 속에 심오한 삶의 지혜가 들어 있다. 지금 여기, 당신의 삶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을까. 당신이 경험한 만큼, 사고의 폭만큼이다. 그 어떤 새로운 상상과 시도를 하더라도 그동안 당신의 몸과 마음에 새긴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경험과 지식은 물색없이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나와 타자는 같은 현상일지라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이며 새로운 지식은 이전의 지식과 섞여 다른 질의 지식을 생성한다. 삶이 후회로 가득하다고 해서 언제든 리셋하거나 초기화할 수 있다면, 이 질서가 깨진다. 세상을 지탱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은 누가 어쩌지 못하는 질서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우린 지금부터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할수 있을 뿐이다.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이 있긴 해도 그 역시 지금까지 해왔던 경험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이 특별히 잘 풀린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당신이 능력이 갑자기 탁월해졌거나 운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사실은 원래 당신 안에 이런 능력이 있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꿈과 야망이 특별히 강한 시기가 있다. 대체로 젊을 때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은 시기에는 마땅히 큰 바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늙어간다고 느낄 때쯤'이면 자신의 한계도 잘 알고 그것의 극복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체념이거나 방치는 아니다. 누구든 충실히 살 권리가 있고 그렇게 사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면, 후회되는 일도 많고,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랄 때도 없진 않다. 하지만 잘 늙어간다는 것은 한편으로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잘 구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 어느 정도 의지가 남아 있지만 무모하지 않은 시간, 지금 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