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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l 10. 2022

치명적 자기확신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더 좁아지는 이유에 대한 짧은 생각

의사소통 과정에서 피로함을 느낄 때가 있다. 상대가 형편없는 인성의 소유자이거나 지나치게 무례한 것도 아니건만 대화가 계속될수록 피로가 더해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어떨 때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지 생각해보니 대화 상대가 자기확신이 강할 때였다.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유독 강한 확신을 가지고 상대를 가르치려 들거나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상황을 꽤 경험했다. 혹시 나도 어떤 사안에 대해서 저토록 강하게 내 입장을 비타협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자기 점검을 할 때도 있었다.

세상의 지식은 모두 '절대진리'일까.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지식은 당대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합의와 검증으로 형성된다.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졌던 지식도 더 설득력 있는 새로운 지식이 나오면 그 자리를 내어준다. 물론 커다란 두 가지의 지식관은 아직도 건재하다. 모름지기 지식이라 함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대에게 전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러하고, 지식이야말로 당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의 산물일 뿐 절대진리는 아니라는 다른 한 편의 주장이 있다. 전자에선 훼손 없이 잘 전수하는 것이 방법론으로 꼽힌다. 다른 한 편의 주장은 지식은 삶의 과정에서 문제 해결의 도구로 쓰일 때 그 의미를 갖는다 한다. 행함으로써 학습(learning by doing)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론이다.


어떤 지식도 하늘에서 뚝 떨어져 절대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어떤 지식이든 사회적 상황과 맥락,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기능한다는 것, 그러므로 잠정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 듀이는 이를 '보증된 주장 가능성(warranted assertibility)'이라 불렀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다른 기준을 설정하기도 한다. '아는 것'과 '하는 것'으로 나누는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사실적 지식, 방법적 지식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상 배움의 과정에서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듀이는 이러한 분리를 고답적 이원론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아는 것에만 집착할 경우 지식의 활용 측면에서 답답함이 올 것이고 하는 것에만 중점을 둘 경우 맥락 없는 낱낱의 경험으로 전락한다.

두 번째로 고민해볼 것은 지식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다.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도하게 '아는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 근거를  끌어오고 그가 믿고 싶은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이 사람이 삶의 과정에서 지식의 속성을 어떻게 체화하였는지, 어떻게 활용했는지,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 했는지와 관계한다.

이처럼 자기가 가진 지식관에 따라 원래 수용한 생각을 신념화하려는 경향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대개의 경우 확증편향은 선택인지(selective perception)로 이어진다. 보고 싶은 것만 가려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토론의 목적이 '이기는 것'에 있다. 토론을 하는 목적은 승패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요, 다양한 의견을 펼쳐놓아 더 좋은 대안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지평의 확대, 지평의 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개인으로 보면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과 새롭게 알게된 것을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엮어 내는 것이다.

글이나 말 등 타자의 텍스트를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보다는 발화자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르고, 그다음에는 내가 과거에 알고 있던 생각과 비교하여 새로운 질의 대안을 찾아 나선다. 물론 늘 말하지만 이 같은 과정에는 끝없는 공부와 대화를 통한 자기 연마가 필요하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토론을 생산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토론은 각 토론자들의 주장을 원천으로 하여 더 좋은 대안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이럴 때만 양극단을 경계하면서 소위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비타협적 진영논리는 당사자들의 인식을 협소한 상태에 머물게 할 뿐만 아니라 대중까지 편가름 하거나 혐오 내지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확신에 기초한 진영논리에 빠지게 될까? 이른바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는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럽게 늘어가는 것일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은 '그러하다'에 더 비중이 있는 듯하다. 젊은이들은 어떨까. 젊을수록 세상의 다양한 의견들은 편견 없이 수용하고 유연하게 사고할까? 최근의 세태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를 과도하게 신뢰하면 이른바 '세대 특성'으로 확장하게 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자기계발서들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자기확신'을 갖도록 부추긴다. '자기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 O가지' 같은 언술이 그것이다. 망설임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능력으로 자기확신을 오용한다. 얼치기 멘토들은 또 어떤가. 젊은이들이 마치도 확신과 신념이 부족하여 능력을 펼치치 못하는 것처럼 가르치려 들고  때로 호통을 친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개인의 노력 여부 뒤에 숨기고 무맥락적 능력주의(meritocracy)를 전파한다.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이유는 능력이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닌 문화적 재생산의 대물림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금수저 흙수저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능력을 너무 강조하면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그려갈 미래의 '좋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멈춘다.   

 
확증편향과 선택인지는 반드시 세대를 구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말을 했지만 이러한 신념이 형성되는 이면에는 그 사람의 경험, 사회적 관계, 공부 이력 등이 두루 관계한다. 상대를 향하여 '치명적 자기확신'에 빠져 있다고 하면서 본인의 협소한 생각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지평의 확대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무엇이든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강한 신념 때문에 생산적 토론이 들어설 자리를 잃고, 이에 따라 극단적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미디어는 조정하기보다 편승한다. 그래서 과도한 자기확신에 빠져 보고 싶은 뉴스만, 보고 싶은 영상만을 본다. 결과적으로 양극단은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판단 능력은 좁아진다. 이 글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극복해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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