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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l 02. 2022

휴식

난 그저 쉼이 있는 삶을 선동할 뿐


지난 주말엔 서울 집에 올 수 없었다. 업무 출장이 토요일까지 이어진 데다 숙소에 돌아오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2주 만에 본가에 오니 비로소 몸이 풀리는 느낌이다. 사람 몸이 참 오묘해서 모질고 강인한 것 같아도 적절한 쉼을 주지 않으면 이내 저항을 한다. 질주하는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몸을 살피라는 신호다. 몸이 저항할 때 마주 저항하면 탈이 난다. 몸은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복잡계 시스템이다. 몸 전체를 조절하고 제어하는 뇌가 CPU와 메모리 역할을 하는 데다 감정까지 갖추었으니 이런 선물이 어디 있나. 인공지능 부러워할 것 없다. 당신의 몸이 가장 값비싼 시스템이요, 플랫폼인 셈이다.  


바깥 사정은 모르겠다. 정지한 듯한 시간이 좋다.


지금 밖은 섭씨 34도로 한여름의 태양이 작렬하고 있다. 내게 주어진 여러 날 중에도 토요일 오후가 좀 한가하다.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와 문자도 뜸하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지그시 깔고 여유를 부리고 있다. 내일 당장 긴급한 업무가 떨어질지언정 지금 여기는 조용한 여백의 시간이다. 내일은 내일이고 당장 주어진 몇 시간의 여유, 그냥 누리면 되는 시간.


지난날을 고백하건대 자의 반 타의 반 일중독에 빠졌을 땐 손에서 일거리가 떠나가면 허전하고 불안했었다.  두 개, 세 개의 긴급한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 다반사여서 하나의 일을 성공적으로 종료해도 성취감을 커녕 깔끔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과제는 끝이 없고 종료라는 개념은 내가 직을 떠나야만 살아나는 것으로 여겼다. 스스로 일중련(국제 일중독 연대) 대표를 자임한 적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교육자 수호믈린스키는 교사를 '한가한 시간의 창조자'라 명명했다. 아이들에게 여백을 허락하여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게 하고 자연을 벗하며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우자는 의도였다. 동시에 교사 스스로도 한가한 시간을 내어 독서와 사색을 즐기도록 했다. 이 과정이 없다면 지적 교양을 쌓을 수 없다고 보았다. 교사의 지적 교양이 교실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안의 구성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지식의 바다를 유영할 수 있는 촉매제로 본 것이다.


한편 잦은 저녁 회식이나 음주는 한국 특유의 직장 문화이다. 젊은 교사 시절부터 회식 자리를 싫어하고 될 수 있으면 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사회성이 떨어진다느니 '실패한 신부님' 같다는 소리도 더러 들었지만 공적 사회성만큼은 착실하게 키워왔다고 자부한다.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사적 관계망에 소홀하면 겪을 수 있는 불이익이 있다고들 한다. 떠도는 소문과 정보에서 소외된다고 두려워 말라.


음주 담화 속에서 흘러 다니는 정보를 취하고 사적 관계를 강화할지, 그 시간에 혼자 고독한 시간을 가질지는 전적으로 행위 당사자의 몫이다. 둘 다 가지려는 욕심이 여백을 앗아가고 과잉 행동을 부르며 결국 몸과 정신을 망친다. 난 공적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고 나머지 시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자주 걷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글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가끔 '나만 몰랐던' 동료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인간관계는 음주 담화가 아니더라도 신뢰 속에서 싹튼다고 믿는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중요한 문제를 공유하지 않았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가족 관계가 어찌 되는지, 나이가 몇 살이고, 어느 대학 출신인지와 같은 문제들은 공적 관계망 속에서는 중요하지 않거나 왜곡시킬 여지가 다분하다. 이런 문제야 말로 하등 물어볼 필요가 없는 사생활의 영역이 아니던가.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말하면 된다.  

감염병으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2년 여를 지냈지만 '관계' 측면에서는 크게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그(그녀)가 하는 말과 글, 행위이다. 그동안 잘 생기고 예쁜 남녀는 뽐낼 기회가 없어서 억울했을지 모르겠다. 외모도 권력이라는 말에 동의했다면 많이 억울했겠지. 현실이 어떤지는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상상과 창조는 많은 경우 현실 저 너머에 있다. 공과 사의 '사이', 현실의 '저편'을 보지 못하면 부박한 삶은 영속될지니.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개념을 말하면서 액체와도 같은 변형질이 개인을 둘러싸고 있다고 보았다. 이 액체성 변형질은 인간의 사색을 빼앗고 관계망 안에 강제로 편입시켜 그저 단순 소비자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창조적 감수성은 사라지고 끝없는 경쟁과 자기착취 속에서 시간을 소비하며 늙어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알았으면 고민하고 실천하라. 나처럼 다 늙어서 뭐라도 깨달은 듯이 여러 이야기 늘어놓지 말고. 오로지 실감할 수 있는 것은 빠르게 흘러간 '시간'이다.


삶의 모든 국면이 경합 속에서 이뤄지고 때론 더 좋은 직위를 구하기 위해, 때론 단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넘어서야만 하는 한국 사회에선 당신의 시간을 스스로 창조할 때만 이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은 어는 정도 용기와 훈련이 필요하다. 오래도록 몸에 붙어있는 습속(일종의 아비투스, habitus)과 결별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상과 창조의 새로운 습관을 반복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아비투스라는 것이 구조와 떨어져서 사고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어떤 취향이나 지향도 무인도에서 습득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모든 결별은 용기가 필요하고 어느 정도는 고통을 동반한다.  

난 그저 당신의 창조적 감수성을 깨우기 위해 고상한 말로 쉼이 있는 삶을 선동할 뿐이다.





커버 이미지 https://unsplash.com/s/photos/rel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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