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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부모교육

공부하지 않는 부모는
미성숙한 성인일 뿐

자녀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유보하는 한국의 부모들께 주는 조

by 교실밖

요람에서 무덤까지 오로지 자식 걱정을 하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가꾸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올인하는 것을 일종의 사회적 규범으로 여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데 10년 이상을 소비한다. 고등학교, 아니 대학 공부를 마치고 나서 자녀가 어엿한 독립 자존으로 섰는지를 보면 안다. 대학을 졸업해도 독립은커녕 취업과 결혼을 위해 부모가 또 다른 방식으로 보살펴야 할 형국이다. 이렇게 부모의 삶은 내 것이 아닌 자녀의 것이 돼 가고, 자녀교육에 집착하는 왜곡된 문화는 대물림의 악순환을 지속한다. 오늘 한국 사회의 처참한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처에 자녀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유보한 부모가 넘쳐난다. 그리하여 시민은 없고 삶을 저당 잡힌 부모만 있다. 서울시에 산다고 시민인가? 진정한 시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공동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이나 언론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까지 이해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사고로 자신의 소양을 쌓아가는 사람이 시민이다. 이런 소양이 이른바 '시민성'이다. 이런 까닭에 오로지 자녀의 성공에만 집착하는 성인은 시민이 아니라 나이만 먹은 미성숙자에 불과하다.

시민성이 결여된 미성숙한 어른들로 사회가 채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선, 현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어려워진다. 누군가 이념대결을 부추기면 거기에 휩쓸리거나 선전과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 언론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를 사실로 착각하거나 좁은 세계관 속에서 보잘것없는 사고를 신념화한다. 그래서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개별화된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린다. 생태, 인권, 평화, 성 감수성을 갖지 못해 꼰대 기질로 버틴다. 나아가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불의는 참고 불이익을 참지 못하는 이기적 삶들이 넘쳐난다. 이것이 모두 공부와 사유가 부족한 탓이다. 왜 그럴까?

모든 사유의 출발점을 내 자녀의 성공에 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삶이 아니다. 학부모 인문학 강의를 하다 보면,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도 어느 결에 '자녀교육' 문제로 귀결하는 것을 본다. 한국 부모의 불안감은 내 아이가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아이는 친구와 경쟁하고 엄마는 옆집 엄마와 경쟁한다. 아빠는 직장에서 동료와 경쟁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압박이 부모들을 자녀에 집착하게 만든다.

지금 인류는 기후위기, 디지털 인공지능의 진화, 감염병의 확산 등 불확실성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OECD 2030은 불확실하고 비예측적인 상황에 맞설 능력을 '변혁적 역량'으로 정의한다. 이 역량을 갖기 위한 조건은 학생이 독립적 존재자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자의 '행위 주도성(student agency)'이다.

이를 위해 사회에서 생성되는 갈등과 딜레마 상황을 잘 조절해야 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 그러면 이렇게 성장한 학생이 국가에 기여하는 재목이 되는 걸까. 답은 '아니오'이다. 학생이 배우고 익히는 궁극의 목적은 바로 '행복'이다.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웰빙을 추구하는 것이 행위 주도성을 가진 학생의 최종 지향점이다.


자녀의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라. 그것이 곧 자녀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이다. 성숙한 시민으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고 책임 있게 행동하면 자녀는 그것을 보고 배우며 성장한다. 책을 읽지 않는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라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공부하지 않는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라'라고 하니 자녀는 부모를 신뢰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절대적인 학습 성취 수준은 아직도 세계에서 상위권이다. 오히려 한국 성인들의 문해력이 하위권이다. 공부하지 않는 부모는 미성숙한 성인일 뿐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자녀 이야기, 학교 이야기, 학원 이야기에 열중하는 부모들은 시간을 그렇게 소모해선 안 된다. 그 시간에 자신의 교양을 쌓고 지성을 가꾸라. 부모가 지성을 갖춘 시민이 되는 것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모습을 자녀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자녀도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한다. 교육기본법 제2조는 온 국민이 지향해야 할 교육이념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부모는 여기에 충실하라. 부모부터 자주적 생활능력을 갖고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라. 그러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국가가 원하는 시민이 아닌가? 인과관계를 바로잡자. 국가가 원하는 인재를 공급받기 위해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국가는 성숙한 시민을 얻는다. 이는 지속가능한 선순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학교에 근무할 때 일이다. 매년 3월이면 학부모 총회라는 것을 한다. 교육열이 높았던 곳이라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참석한다. 학부모들이 교실에 다 모였을 때, 내 소개를 간단히 하고 "자, 지금부터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하면서 실제로 참석자의 이름인 'OOO님'으로 불렀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가 아닌 그 자신의 이름 말이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기도 하고 어색한 듯했던 학부모들이 이내 마음의 경계를 풀고 즐겁게 한 시간 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회의가 끝나고 몇 분이 다가와서는 "정말 고맙다."라고 말했다. 큰 수고를 들인 것도 아니고 나로서는 몇 해를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일상적인 일이었는 데도 그분들에게는 '자기를 찾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시민교육은 거시담론만으로도, 단지 실천만으로도 이뤄질 수 없다. 담론과 실천 사이를 유동하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생각, 행위가 중요하다. 갈길이 멀다고 한 걸음조차 떼지 않는 것은 시민으로서 직무유기다.



커버이미지 Kids' Expectations of Parents Are Just as Valid as Parents' Expectations of Kids | The Swad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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