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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pr 22. 2023

개연성의 현재화

상상 가능한 자극적 소재를 모두 넣어야지 드라마가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장면이 나올 때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최근 학교폭력을 다룬 드라마(더 글로리)나 정치 드라마(퀸메이커)가 인기를 끌었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즉 개연성이 충만한 줄거리가 인기의 비결이다. 소설이나 각본이 '있을 법한 거짓말'을 다루는 분야라 드라마의 충만한 개연성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개연성이 '동시'에 '모두' 나타나는 경우라면 좀 따져볼 여지가 있다. 더 글로리나 퀸메이커 같은 드라마 속에 나오는 개별 사실들은 개연성이 충만하다 못해 현실과 종종 혼동될 정도이다. 현실에서 모든 사건은 인과관계가 있고, 여러 개가 동시에 혹은 앞뒤로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충격적 사건이 동시에 겹쳐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의 경우, 작가는 현실에서 있었던, 혹은 있을 법한 개별 사건을 종합하여 하나의 스토리 안에 집어넣는 기술이 뛰어나다. 나는 이것을 '개연성의 현재화'라고 부르고 싶다.

현재화한 개연성은 종종 드라마를 극단적으로 만들며 착시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시청률을 의식한 
드라마 작가가 노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매 장면은 충격적이고, 인물 간의 갈등은 증폭하며, 해결 과정 역시 극적이다. 시청자가 개연성이 충만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드라마 속의 개별 사건들이다. 사건 하나하나는 현실성이 넘친다. 

문제는 그것들이 늘, 우연히도, 한 드라마 속에서 동시에 일어남으로써 훨씬 더 지독한 서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개연성의 현재화는 소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한 줄기의 서사 안에서 살인, 폭력, 마약, 자살 등의 사건이 '모두' 일어난다. 음주, 흡연에 대한 표현은 말할 것도 없다. 
감각이 무뎌지는 대중이 늘어나고 이들은 좀 더 자극적 소재를 찾는다. 작가들은 하나의 줄거리 안에 더 자극적인 사건들을 배열하기 위한 스토리를 구성한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확대되고 있는 OTT 서비스는 인터넷을 통해 방송 프로그램·영화·교육 등 각종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한다. 영화나 드라마 첫머리에 이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연령 제한 조건을 붙이지만 OTT 서비스에선 의미가 없다. 즉 누구든, 어디서든 인터넷에 연결된 TV나 디지털 단말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다. 

살인 장면의 묘사, 학교폭력의 잔혹한 장면들, 마약 등 약물을 다루는 콘텐츠, 스스로 세상과의 결별을 선택하는 비극적 장면들이 그대로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노출되고 있다. 이런 소재를 다룰 때 교양 있는 사회는 약속을 한다.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인정하되, 콘텐츠에 접근하는 대상에는 제한을 두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어린이, 청소년들에게는 접근을 제한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모든 연령이 관람 가능한 것이 있고, 12/15/18세 등으로 구분하여 접근을 제한하고 영상의 도입부에 경고 문구를 표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OTT 서비스의 범람은 이 제한이 의미가 없다. 여기에 대하여는 책임 있는 국가사회적 조치가 필요하다. 각 가정의 자율에 맡기기엔 그 심각성이 너무 크다. 

2010년 1월 북유럽 학교 탐방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핀란드에선 청소년 자살률이 높았다. 이를 줄이기 위해 만든 '보도준칙'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자살 사건이 있는 경우 자살 동기, 방법 등은 생략하고 단신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정에서 유명 연예인이 자살을 하니 그 해 수백 명의 모방자살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베르테르 효과'라 불리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지금은 자살에 관한 보도를 할 때는 최대한 간단히 사실 관계만 알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권고기준 3.0>이 그것이다. 아래에 잠깐 소개를 해 보겠다. 

<자살보도 권고기준 3.0> 5가지 원칙

1. 기사 제목에‘자살’이나 자살을 의미하는 표현 대신‘사망’, ‘숨지다’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2. 구체적인 자살 방법, 도구, 장소, 동기 등을 보도하지 않는다.
3. 자살과 관련된 사진이나 동영상은 모방자살을 부추길 수 있으므로 유의해서 사용한다.
4. 자살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 자살로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와 자살예방 정보를 제공한다. 
5. 자살 사건을 보도할 때에는 고인의 인격과 유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 유명인 자살보도를 할 때 이 기준은 더욱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www.journalist.or.kr/news/section4.html?p_num=12)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디지털 네트워크는 관련 소식을 실시간으로 빠르게 대중에게 전파한다. 권고기준은 마련하였지만 SNS는 공식 뉴스보다 빠르게 네트워크를 통해 퍼진다. 그 과정에서 자극적 표현들을 더한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빠른 발전은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기술진화는 늘 양면성을 갖는다. 이를 정화할 사회적 능력이 생기기 전에 첨단기술의 부정적 측면들이 앞서가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자극적인 영상 미디어는 범람하고 있고, 사실상 모든 소재의 제한이 풀려 있는 상황이며 OTT의 대중화는 어린이, 청소년까지 제약 없이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작가들이 갖는 고유의 권한을 침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은 언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어떤 경우 현실은 드라마보다 훨씬 지독하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교육을 업으로 삼은 사람의 입장에서 걱정과 우려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 줄거리 안에 상상 가능한 자극적 소재를 모두 집어넣어야지만 드라마의 재미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 빈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OTT 범람에 따른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가 일상화된 세상에서는 나의 한 줄 텍스트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존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를 거치며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는 과연 자정 능력이 있을까. '개연성의 현재화'라는 말을 며칠 째 생각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드라마 '퀸메이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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