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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y 07. 2023

몸, 지각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지도는 '지구 표면의 일부 또는 전체의 상태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서 평면에 나타낸 그림'이다. 인식 대상으로써 지도는 우리의 의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특정 지역을 이르는 지도에 대하여 너와 나의 인식이 다를 수 없는 이유이다.  대상을 초월하여 공통으로 인식되는 지도의 의미는 하나의 약속으로써 객관성을 갖는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지도를 제대로 읽는다면 약속된 위치에서 정확하게 만날 수 있다. 강변을 걷다가 안내를 위한 지도를 자주 만난다. 예외 없이 '현 위치'가 표시돼 있다. 지도에 표시된 현 위치는 지표면 위에 내가 있는 장소를 나타낸다. 누구나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위치 표식이다.




동시에 지도상의 현 위치는 내 발바닥이 지표면과 닿은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위치라는 객관적 사실 위에 개인의 주관이 결합한다. 발바닥을 통하여 올라오는 지표면의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 지도 위의 동일한 위치라는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내 몸과 지표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때의 지표면은 경도와 위도가 교차하는 '지도상의 위치'가 아니라 내 몸이 느끼는 '물자체'이다. 


내 몸은 지표면이 가진 질감으로부터 딱딱함 혹은 부드러움 등을 느낀다. 내 몸은 내 느낌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몸이 인식 주체이자 대상이라는 사실로부터 지각, 놀이, 창조, 예술을 시작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물자체라는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창조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공동의 인식과 내 몸의 지각이 만나는 곳에서 이뤄진다. 


너와 내가 꼭 같이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든 개별 인간으로부터 추상을 거친, 인간 공통의 속성을 갖는다. 예컨대 인간을 직립보행을 하면서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하면, 이 존재에 대한 의식은 너와 내가 달리 사고하지 않는 보편적 인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공통 속성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개별 속성'을 갖는다. 모두의 의식 속에서 '땅'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자리잡지만, 분명 내가 딛고 서 있는 땅과 당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은 다르다. 다르지 않다면 그 모든 인간의 창조와 예술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

 



너와 나의 의식 속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지도'와 지금 내가 딛고 있고, 내 발바닥을 통해 특별한 느낌을 주고 있는 지표면은 다르다. 이것은 개념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체험'의 과정을 거쳐야만 느낄 수 있는 영역이다. 공통 속성으로 묶여 있는 보편적 지점이 있고, 개별 속성으로 분리돼 있는 특별한 지점이 있다. 우리의 몸은 인식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합적으로 체험한다. 


걷기는 오랜 나의 습관이자, 몸을 통한 지각 및 체험 과정이다. 하루 수천 보도 걷기 힘들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그땐 '물 위를 걷는 것도 기적, 땅 위를 걷는 것도 기적'이라는 말을 실감했었다. 걷기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고, 땅 위의 온갖 생명체를 관찰할 수 있다. 싱그러운 녹색은 단 한 번도 꼭 같은 색이었던 적이 없다.  


지표면과 내 발이 닿는 반복 작업을 통해 위치를 옮기는 작업이 바로 걷기다.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몸의 지각이 나를 체험의 세계로 이끈다. 특히 걷기를 통해 얻는 사색의 즐거움이 있다. 진부하거나 혹은 엉뚱하거나 내 의식 형성의 많은 부분이 걷기에서 나왔다.    

디지털 단말기 위에 표시되는 지도는 어떨까. GPS를 장착한 디지털 단말기는 내 몸이 있는 곳을 지도 위에 찍는다. 내가 움직이면 동시에 따라 움직이는 점 말이다. 내 걸음 수를 계산하고, 지나온 궤적과 거리까지 지도 위에 표시한다. IoT 기반의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이 체험을 디지털화한다. 인공지능이 지도 위 객관의 세계와 인간의 지각 사이에 다리를 놓는 형국이다. 


오늘 나는 2만 4천 보를 걸었다. 걸음 수를 측정한 이래 가장 많이 걸었다. 걷는 도중 내내 생각했다. 지표면에 닿아 있는 내 발바닥의 느낌과 디지털화한 지도 위에 그려지는 이동 궤적, 한 발을 뗄 때마다 계산되는 걸음 수... 도대체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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