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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y 19. 2023

장소와 좌표

아날로그적 일상에서 디지털 행위로

공동주택이나 백화점, 마트의 대형 주차장 기둥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다. B5(지하 5층), 3-14(3열의 14번째 기둥)와 같은 방식이다. 식별을 위한 기둥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차를 세워 두었는지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이것을 암기하는 것도 힘드니 아예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쉽게 찾아간다. 머리에 담아둘 것은 단서가 될만한 특정 장소의 풍경이 아니다. 단지 숫자 정보를 재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현대인은 아날로그적 장소 개념에서 디지털화한 좌표에 익숙해지고 있다. 장소 정보를 주고받을 때 '좌표를 찍어줘'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장소의 풍경이나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닌 가로와 세로가 만나 하나로 식별되는 숫자화 한 좌표면 충분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에는 두꺼운 지도책을 운전석 옆에 두고 다녔다. 종이로 된 지도 어딘가에 내가 가야 할 목적지가 있었고, 지도와 실제 풍경을 비교하면서 원하는 곳을 찾아갔다. 지금 차를 운전하면서 지도책을 보는 사람은 없다. 대신 지도를 실시간으로 디지털화한 내비게이션을 본다. 내비게이션은 GPS를 통해 인공위성과 실시간으로 교신하면서 교통상황을 반영하고,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한다. 당연하게 여기면서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상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종이 위에 그려진 지도를 실제 풍경과 대조하여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아날로그적 능력이 필요했다면, 현재는 그저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경로를 따라가기만 하면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어디에 단속 카메라가 있는지, 어느 경로로 갔을 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건물의 주차장 입구까지도 상세하게 안내한다. 요즘 운전을 배운 사람에게 지도책 하나 주고 목적지를 찾아가라고 하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지표면 위에 펼쳐진 장소 개념은 디지털화하여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단 하나의 지점인 '좌표'로 축소하는 것이다. 훨씬 더 정확하지만 '장소'라는 어감이 주는 아날로그적 감상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에게 내비게이션 없이 초행길을 찾아가라 하면 꽤 어려울 것이다. 이미 우리의 뇌 세포는 디지털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게 재배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과거의 익숙한 것들과 도리 없이 결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의 뇌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과거에 100개 이상의 전화번호를 외웠던 사람도 지금은 자신 것 외에는 기억하는 전화번호가 없을 정도이다. 스마트 단말기 안에는 수백에서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으며 이름만 검색하여 누르면 전화를 걸 수 있다. 기억력이 퇴화하고 있는 대신 인간은 무엇을 얻고 있을까. 영상 미디어를 빠르게 찾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은 훨씬 확장한 것 같아 보인다. 기억의 퇴화에 따라 사유와 통찰의 필요도 줄어들고 있다. 젊은 세대는 복잡하게 사고하거나 깊이 있는 사색을 하지 않는다. 원하는 모든 것은 한두 번의 클릭으로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릴 때마다 기둥 번호를 사진으로 남기는 행위는  단순하고 습관적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것은 '기억'을 돕는 행위라기보다 단순 식별에 필요한 절차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동차가 어디에 있든 인간이 그 장소나 풍경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렌즈를 통해 들어온 장소는 디지털화되어 메모리에 있다가 언제든 호출된다.

우리의 뇌는 더 이상 아날로그 방식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영역을 갖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달라지는 뇌세포의 재배열을 느낄 사이도 없이 우린 자동차의 위치, 지인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필요할 때에 꺼내어 쓸 뿐이다. 


생성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발달은 검색창 세대와 프롬프트(생성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에서 사용자의 입력을 기다리고 있는 채팅창) 세대를 나누고 있다. 정보 자원의 출처에 다가가도록 돕는 검색창보다 문장까지 완성하여 보여주길 기대하는 사용자는 앞으로 훨씬 늘어날 것이다. 여러 정보를 종합하고 출처를 밝히며 자신의 견해를 섞어 문장을 완성하는 글쓰기는 '과거의 것'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점점 더 문해력, 창의력, 문제해결력, 의사소통능력이 필요해지고 있지만 이는 당위일 뿐이다. 인간의 사유 체계를 앞서가는 인공지능 기술을 발달은 전통적인 인간의 능력보다 '즉시 발견, 즉시 적용'과 같이 인공지능에 더욱 의존하는 형태로 인간을 조형해나가고 있다. 더할 수 없는 편리함과 극단의 효율성 추구 앞에 인간의 고유성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장소는 물리적 형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장소에는 풍경과 추억이 있다. 장소는 인간을 환대하거나 외면한다. 말하자면 장소는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인간의 뇌에 각인된다. 좌표는 넓이를 가진 영역이 아니다.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단 하나의 지점이다. 좌표는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풍경도 추억도 있을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식별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뇌세포의 재배열은 우리를 채근한다. 장소적 인간에서 좌표적 인간으로. 아날로그적 일상에서 디지털 행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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