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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y 21. 2023

위로 사회

상투적이고 정형화한 위로를 넘어 

TV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잠시 보았다. 유명 강사가 삶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강사는 때로 진지함을, 때론 유머를 섞어 스튜디오에 모인 청중과 시청자들을 강의에 몰입하게 했다. 유머를 구사할 땐 코믹한 표정을 짓다가 진지한 얘기를 할 땐 강사 스스로도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는 듯했다. 카메라는 현장에 모인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수시로 비췄다.

TV 속 강의는 영상 편집 기술과 더해져서 더욱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내가 알기로 이 강사는 수천 회 이상의 강의를  했고, 그때마다 넘치는 유머와 제스처로 청중들을 웃기고 울렸다. 강의는 예외 없이 일상에서 소재를 찾는다. 가족, 직장, 관계, 사랑, 소통을 자주 다룬다. 듣는 사람들은 마치 본인의 얘기를 듣는 듯하다. 이 강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지금 당신이 힘든 것은 당신 탓이 아니야"라든지, "삶이란 생각하기 나름이야"라는 말을 반복한다. 
한 꼭지마다 예화를 바탕으로 하는 교훈이 있고, 이를 의미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 매듭을 짓는다. '생활 속 예화 - 강사의 짧은 분석 - 교훈과 감동을 담은 메시지로 마무리'하는 것은 이 강사의 흔한 강의 패턴이다. 청중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언어와 공감하는 힘은 이 강사의 탁월한 능력이다. 무엇보다 '위로받았다는 느낌'이야말로 이 분이 대중적으로 자주 호출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매일 다른 청중에게 웃음과 위로를 전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아마도 이 강사에게 고충이 있다면 너무 많은 강의를 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소재의 고갈일 것이다. 흔한 패턴이라고 했지만 생활 속 에피소드와 
교훈을 어떻게 연결할지 매일 고민하겠지. 그러면서도 억지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인다. 어떻든 좋은 강의를 위해 노력하는 점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각박해서 그런지 요즘 이런 류의 강의나 책을 찾는 이들이 많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아쉬움은 다른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듣는 사람의 경험이나 공감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들릴 것이다. 그러니 내 아쉬움은 그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먼저 말해둔다. 이 분 영상을 보면서 언젠가부터 식상함을 느꼈다. 조금 더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이분이야말로 매너리즘에 빠져 자기 발전을 멈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번 달라지는 청중들은 그 점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일상에서 찾은 쉬운 언어에다 적절한 교훈, 넘치는 유머를 구사하면서 청중과 공감하기가 어디 쉬운가. 내 질문은 이렇다. 

"그 위로는 어떤 위로인가?" 


세상엔 긴장과 스트레스, 사회정서적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방식이든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위로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위로를 전하는데 그 무슨 엄격한 체계와 방법이 필요하겠는가. 그 순간이라도 생활의 곤궁함을 잊고 크게 웃고 공감하며 이로 인해 위로받은 느낌을 받았다면 족한 것이 아닌가.


마치도 상품처럼 포장되는 위로, 수요와 공급이 만나 이뤄지는 '상업화한 위로'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위로들이 다 그렇다. 지금 당장 검색엔진에 '힐링'이라는 검색어를 넣어보라. 무엇이 나오는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팔리고 있는 힐링 산업의 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 위로와 힐링은 공짜가 아니라는 확인이다. 

나는 위에서 예로 든 유명 강사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멋진 비유와 잘 다듬어진 말로 위로를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 멋진 문장에서 '자판기에서 나온 듯한', '상투적인 기시감'을 느낀다. 거듭 확인컨대 내 느낌에 불과할 수 있다. 내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좋은 강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며, 그 점에 관해 폄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분이 좋은 강의를 위해 긴 시간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나야말로 그분에게 "이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라는 말을 돌려주고 싶다. 당신의 위로는 고단한 현대인에게 힐링을 권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층 속에 있다. 


사회 구조가 '병 주고 약 준다'는 식의 흔한 비유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누군들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심금을 울리는 멋진 말이 주는 일시적 감각 이완 상태를 맛볼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내적 변화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위로는 '무늬만 위로'일 가능성이 크다. 위로하자는데 거짓 위로가 있고 진짜 위로가 있겠냐만, 일시적 평온과 지속적인 힘을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따뜻한 말이나 행위로 상대에게 평온함을 주는 것이 위로의 의미라고 하면, 일시적 평온 역시 중요하다. 지금 당장 힘든 사람에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다. 

"당신의 문제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신이 바뀌어야 해"라는 식의 이율배반적 위로가 반복되는 것, 이것의 상투성과 정형화한 패턴을 말하는 것이다. 원인을 개인에게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그 해답도 '개인의 부단한 노력'일 뿐이다. 강의를 경청한 개인이 "그렇군, 나만 바뀌면 되는군"을 깨닫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런 접근은 인간을 끊임없이 객체화한다. 인간의 많은 문제가 이러한 구조적 소외에서 비롯한다.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은 사회가 된다는 말처럼 공허한 것이 또 있겠는가. 누군가는 지금 당장의 문제를 고민할 때 누군가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당장 따뜻한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고, 도대체 내가 힘든 구조적 이유가 무엇인지, 나만 바뀌면 해결이 가능한 문제인지, 다른 누구와 연대해야 할지, 스스로 질문하고 또한 답해야 한다.  


덧붙임> 이 글은 다중을 상대로 위로를 전하거나, 그런 종류의 상업화한 힐링, 개인의 성찰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방식의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글이다. 병 주고 약 주는 방식의 힐링을 권하는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들끼리의 위로는 여전히, 더 필요하다.  





커버 이미지 https://destinyimpactchurch.org/a-son-of-conso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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