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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l 01. 2023

팩폭 위로

당장의 평온을 넘어 문제 해결의 전망을 갖기

'팩폭'은 '팩트 폭력'의 준말 '사실에 입각해 상대방이 감추고 싶어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행위'이다.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문제가 객관적 사실로 타자에게 노출됨으로써 심리적 괴로움을 느낀다. 팩트에 위로를 덧붙인 '팩폭 위로'는 또 무슨 말일까. 한 사람을 사실 앞에 노출시켜 심리적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과 그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어휘를 붙여 쓴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글을 흥미롭게 읽기 위해서는 지난번에 썼던 '위로 사회'가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위로 사회 (brunch.co.kr) 그 글에서 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당신의 문제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신이 바뀌어야 해"라는 식의 이율배반적 위로가 반복되는 것, 이것의 상투성과 정형화한 패턴을 말하는 것이다. 원인을 개인에게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해답도 '개인의 부단한 노력'일뿐이다. (유명 강사의) 강의를 경청한 개인이 "그렇군, 나만 바뀌면 되는군"을 깨닫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개인에게 돌리는) 이런 접근은 인간을 끊임없이 객체화한다. 인간의 많은 문제가 이러한 구조적 소외에서 비롯한다.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은 사회가 된다는 말처럼 공허한 것이 또 있겠는가. 누군가는 지금 당장의 문제를 고민할 때 누군가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당장 따뜻한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고, 도대체 내가 힘든 구조적 이유가 무엇인지, 나만 바뀌면 해결이 가능한 문제인지, 다른 누구와 연대해야 할지, 스스로 질문하고 또한 답해야 한다.  




위로는 타자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위로를 받는 과정에서 심리, 정서상의 변화를 동반한다. 위로를 받았다는 느낌 후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며 걱정과 우려가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는 중요한 절차 중의 하나이다. 우리 주변에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특히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주는 위로를 받고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이 같은 현상은 문제의 근원적 해결보다 당장의 위안을 구하는 조급함과 이에 따른 '위로의 기술'을 넘치게 한다. 위로는 기술로 치환되고, 나아가 '힐링 산업'이 번창한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이 '문제 그 자체'는 사라지고, 통렬한 자기 탐색과 성찰은 멈춘다.


지금 고통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많은 상담가들이 내담자의 상황을 분석하지 말고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말한다. 일차적으로 내담자의 심리 상태를 평온하게 이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극적 경청이라는 말도 비슷한 유형의 기법이다. "그래요, 그렇군요. 마음이 많이 아팠겠어요." 이렇게 맞장구를 치며 내담자가 자기 이야기를 쏟아 내는 사이 스스로 평온에 이르게 한다는 '경청'은 상담의 기본으로 통한다.


그러나, 문제 상황을 듣고 형식적 공감을 표하는 과정에서 상대가 잠시 평온에 이를 수는 있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답은 당신이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치유가 도래한다'는 언술은 소극적 개입이거나 또는 회피일 뿐이다. 내가 어떤 말을 누군가에게 하면서 상대의 경청과 공감 표현에 따라 자신을 돌아보고, 눈물을 쏟는 과정 끝에 남는 '정화(catharsis)'가 있다. 물론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이 여전히 모호하고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정화는 무의미한 자족감에 불과하다.




이쯤 해서 '팩폭 위로'의 의미를 알아보자. 이질적 단어의 조합으로 탄생한 어색한 말은 문제 상황의 본질에 최대한 다가가서, 얽힌 실타래의 끝을 찾는 작업이다. 현재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정직하게 자신의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 지금 당장 마음의 평온을 넘어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과정은 쓰리고 아프다. 때로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이 상황을 견딜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선택은 당신이 한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잠시 덮고 잊을 것인가.

'자기 직면'의 과정이 힘들다고 그저 당장의 평온만 구하는 회피가  장기화하면 문제 해결은 난망하다. 자기를 직면하는 것은 '팩트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말한다. 내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누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내 문제의 어려움에 대하여 타인에게 원인을 돌리면 해결은 어렵다. 나는 당신이 말 잘하는 사람의 위로를 구하기 전에 마음의 근육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함으로 강조한다. 흔히  멘털이라 부르는 이 마음의 힘을 기르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상황을 분석하고, 그곳에 관계하는 타인, 구조의 문제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물론 전문가가 개입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최근 어린이,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의 심리•정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회 진화에 따라 늘어난 것일 수도 있고, 진단 기술의 발달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우울이나 불안 등 여러 심리적 문제를 '마음의 감기' 쯤으로 인식하고 쉽게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과거에 비해 훨씬 늘었다. 전문적인 검사, 치료, 약물 등 치유를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런 과학적 치료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 모든 경우에 당사자가 부여하는 상황에 대한 의미와 극복을 위한 의지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다.


내 문제를 내가 들여다보는 과정이 쉽지 않아 타인의 조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똑같은 문제도 타인에게 지적을 받을 땐 인정이 어렵고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팩폭에 의한 위로를 구하고자 한다면 각오와 훈련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지켜야 할 기준이 있다. 위로를 구하는 사람의 인격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가 한 행동, 말, 글에 대하여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넌 이런 사람이야. 앞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아"라고 하기보다 "네가 한 OOO에 대한 그 행동을 바꾸어 주길 바라." 이 단순한 원칙은 위로를 구하는 자, 위로하는 자의 신뢰 위에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숱한 어려움을 동반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타자의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객관화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이런 훈련을 하기 위해 문학 작품에 심취하고 예술 행위를 통해 경험의 폭을 넓힌다. 또한 자기만의 독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 타인과의 끊임없이 대화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찬사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한 행위, 말, 글에 대한 평가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진다. 팩폭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을 인정할 수 있으면 성장의 에너지가 되는 것이고, 인정할 수 없을 때 남는 것은 분노뿐이다. 진짜 위로는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직면하는 가운데 문제 해결의 전망을 갖는 것에서 온다. 늘 그렇듯이 선택은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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