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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Sep 27. 2024

춤을 추다(3)

긴 하루였다. 지영에겐 매일이 길었다.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은 상헌을 ‘사범형’이라 불렀다. 관장은 상헌에겐 수강료를 받지 않았고, 그 대신 하루 한 시간씩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도록 했다. 가끔 용돈도 주었다. 스물댓 살이나 먹은 사범이 하나 있었지만 요새 바람이 들었는지 자주 결근을 하기도 했고, 가르치는 것도 성의가 없어서 불만이었다. 군대에서 갓 전역하여 아이들의 군기를 잡는답시고 거칠게 다루었다. 적당한 때에 자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헌이가 몇 살만 나이를 더 먹었어도 메인 사범을 시킬 수 있는 건데 하며 아쉬워했다.

  상헌이는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두 마디가 없는 것을 빼고는 나무랄 곳 없는 사범의 역할을 했다. 태권도장의 사범은 운동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잘 놀아줘야 하고, 도장에 있는 동안 아이들을 잘 보살펴야 했다. 괜히 고난도 운동을 가르친다고 설치다간 사고가 날 수 있고 그러면 부모들이 도장을 옮길 테니 말이다. 관장은 “요즘 도장은 그냥 돌봄 서비스야” 하면서도 애들이 줄어들까 걱정하였다. 10년 전에는 그래도 사시사철 태권도를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눈에 띄게 아이들이 줄었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정도였다.


  상헌이는 어렸을 때부터 관장이 끼고 가르친 아이였다. 이 놈이 열다섯 살이 되니 어깨가 떡 벌어지고 운동 능력도 정점에 이르러 국가대표로 키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관장은 메인 사범보다 상헌을 더 아꼈다. 전에는 수강생을 실어 나르는 전용 봉고차와 기사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해 하루 두 번 지입차량을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운행비 정산을 했다. 주로 유치원 차량을 운행하는 기사들이 가외 시간을 이용하여 아르바이트를 했다. 관장은 이런 도장의 어려움만 아니면 어린 상헌이를 정식 사범으로 쓰고 용돈이 아닌 월급을 주고 싶었다.

  관장은 상헌이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어느 한도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노동일을 하는 아빠와 집을 나간 엄마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대화 중에 언급하지는 않았다. 가끔 술에 취한 상헌 아빠는 관장을 찾아와 도장에서 상헌이를 공짜를 부려먹는다고 호통을 치면서 술값을 받아가곤 했다. 도장 문을 닫을 시간에 찾아오면 관장은 상헌 아빠를 따라가 근처 편의점 밖에 놓인 테이블에서 술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관장은 끄덕거리며 상헌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상헌 아빠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두 남자는 그저 눈을 끔뻑거리며 묵묵히 술잔을 비우다가 헤어지곤 했다.


  상헌 아빠는 일이 있을 땐 지방에 가서 보름에서 한 달씩 머물다 올라왔다. 건축 공사장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한다고 했다. 전화로 일감을 받을 때 ‘조적’이나 ‘쓰미’ 같은 말을 섞어 대화를 했다. 오래전부터 밥을 짓거나 즉석밥을 데워 먹는 것이 상헌 아빠와 상헌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상헌 아빠는 가끔 폭음을 하는 것 말고는 성실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일감이 자주 들어올 때는 수입도 좋았다.

  일감이 없을 땐 한 달까지도 쉬는 경우가 있었다. 대체로 한 달에 열흘에서 보름 정도 일하는 편이었다. 노동일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아프고 쑤신 곳이 많아 쉴 땐 동네 병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했다. 일하면서 사귄 사람 말고는 친구도 없었다. 가끔 혼자 술을 먹다 문득 적적함을 느낄 때면 도장으로 찾아가 관장을 불러냈다. 두 남자는 그렇게 편의점 야외 파라솔 밑에서 별말 없이 소주나 맥주를 먹었다.
 
  그렇다고 상헌 아빠가 관장을 자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적적해도 너무 자주 찾으면 관장이 싫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이 자기 때문에 불편해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떨 땐 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상헌에게 삼겹살을 사 오라고 시켰다. 소주를 마시면서 상헌에게 삼겹살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운동을 한다는 놈이 부실하게 먹는 것 같아 늘 그것이 안쓰러웠다.


  “야 이놈이 지 누나라고 감싸네? 마 그래도 못생긴 건 못생긴 거야.”  
   “사범형, 외모 지적 하는 건 나쁜 거예요. 인권 침해라고...”

   “그래, 미안하다. 초딩이 아는 게 많네. 아는 게 많으니 먹고 싶은 것도 많겠지? 근데 지수는 뭘 좀 더 먹어야겠다. 운동하려면 잘 먹어야 돼. 삼겹살 같은 거... 누나가 고기반찬 안 해주니?”
   “남이야. 사범형이나 잘 챙겨 드세요. 우린 매일 고기 반찬해서 잘 먹어요...”
 
  상헌은 지지 않고 맞대드는 지수가 귀여웠다. 성격도 좋고, 집중력도 뛰어나서 이제 몇 개월만 더 열심히 하면 품띠에 이를 것 같았다. 도장에서 돌아온 지수는 씩씩거리며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우리 삼겹살 구워 먹자. 고기 먹고 싶어.”
   “그럴래? 그럼 삼거리 정육점에 가서 삼겹살 5백 그램만 사와. 그리고 남은 돈만큼 슈퍼에 들러서 상추도 사 오고.”
 
  지영은 지갑을 뒤져 꼬깃한 만원 짜리를 꺼내 지수에게 주었다. 지수는 몹시 즐거운 얼굴로 엉덩이를 흔들며 뛰어갔다.
 
   “지동아 우리 고기 먹자. 좀 있다 지수가 고기 사 올 거야.”
 

  지동이는 박수를 치면서 “고기! 고기!”를 외쳤다. 지영은 지동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상을 차렸다. 잠시 후에 지수는 상추와 삼겹살을 사들고 들어왔다. 지영은 상추를 씻고 지수는 즉석밥 두 개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소형 가스레이지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달구어지길 기다려 삼겹살을 올렸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삼겹살이 오그라들었다. 지영은 노릇하게 구운 삼겸살을 상추에 싸서 쌈장을 조금 얹어 지동의 입에 넣어주었다. 지동이 씹기도 전에 물었다.
 
   “맛있니?”  
    “응!”
 
  지수도 상추 위에 큼직한 삼겹살 조각을 올리고, 그 위에 밥도 얹은 다음 싸서 입인 가득 넣었다. 볼이 부풀어 올랐다. 지영도 상추에다 삼겹살을 올리고 김치도 한 조각 얹어 입에 넣었다. 기름진 육즙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프라이팬에서는 연신 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삼겹살이 익어 갔다. 지수와 지동의 얼굴에 행복감이 넘치는 듯했다. 지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동생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었고, 지수와 지동이가 큰 탈 없이 잘 자라주니 그것도 좋았다. 또 엄마가 밤에 일하고 낮에는 집에 있으니 그동안 지동이를 봐줄 수 있다는 것도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소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질 때, 지영은 뿌듯했다. 그때 입안에 고기를 가득 넣고 씹던 지수가 말했다.  
 
   “누나 근데, 우리 도장에 왜 그 사범형 있잖아. 이름이 상헌인가 그렇던데...”
   “알아,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그 운동 잘하고 오른쪽 손가락 없는 애, 근데 왜?”
   “그 형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나한테도 잘해주고. 운동할 때도 되게 열심히 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진짜 집중력 짱이야. 나도 그렇게 운동 잘하면 좋은데...”

   “그래? 지수에게 잘해주면 좋지 뭐”
   “근데 그 형이 누나 얘기를 했다?”
   “상헌이가 내 얘기를? 요즘은 거의 얼굴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데?”
   “음... 그냥 뭐... 까먹었어...”
 
  지영은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삼겹살 5백 그램은 셋이 먹기에 부족했다. 오늘따라 지동이도 잘 먹었고, 지수는 거의 미친 듯이 달려들어 채 20 분도 안 되어 프라이 팬의 바닥이 드러났다. 지수가 아쉬운 듯 말했다.
 
   “누나 다음엔 일 킬로그램 먹자. 난 다 먹을 수 있어...”
   “그래 그러자. 남으면 김치찌개 끓여 먹으면 되니까.”
 
  지동은 졸음이 몰려오는지 벌써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었다. 지영은 지동을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기름이 잔뜩 묻은 손을 씻기고, 칫솔에 치약을 묻혀 지동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잠시 후에 화장실에서 나온 지동은 얼굴에는 물만 조금 묻어 있고, 입가에는 하얀 치약이 그대로 묻은 채였다. 지영은 물티슈를 한 장 뽑아 얼굴과 치약이 묻어 있는 입가를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지동은 이내 제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지수도 잠자리에 들 것이다. 지영은 대충 정돈을 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옮겼다. 어김없이 소라에게서 전화가 왔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설거지를 하고 자야 하는데...” 하면서도 몸이 피곤해진 지영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 조금 일찍 일어나서 설거지부터 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새벽에 들어온 엄마가 소리 없이 설거지를 해놓을 수도 있고. 긴 하루였다. 지영에겐 매일이 길었다.



다음 화, 춤을 추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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