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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Oct 02. 2024

춤을 추다(5, 최종)

동네 언덕배기의 기묘한 축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몇 달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전히 새벽에 귀가하는 엄마는 바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자주 지동이를 꼭 끌어안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영은 엄마가 갑자기 아프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늦게 귀가하는 것도, 술 취한 날이 늘어나는 것도 감내할 수 있었지만 그나마 엄마가 아프다면 지동이와 지수는 물론이고 생활에 위기가 올 것만 같아 불안했다.

  상헌 아빠도 일감이 없는 날이 늘어났다.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운동하려면 잘 먹어야 돼.” 라면서 상헌에게 고기를 먹였다. 보름에 한 번은 관장을 불러내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상헌이 보기에 저렇게 재미없게 술을 먹는데 술맛이 나나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조용하고 진지하게 술자리를 가졌다.


  상헌 아빠는 관장에게 “저 놈이 운동으로 먹고살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그러면 관장은 “지금대로만 꾸준히 운동하고 대회도 나가고 하면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라고 답했다. 상헌 아빠는 “아니, 관장도 알다시피 저 놈이 가운데 손가락 두 마디가 없잖아. 그래도 지 좋아하는 운동 하면서 직업도 얻을 수 있겠는가 말이지”라고 걱정했다. 관장은 “최소한 도장은 차릴 수 있고, 제가 도와주겠다”라고 말했다. 매번 술자리가 끝날 즈음이면 꼭 ‘형님’, ‘아우’라고 서로를 불렀다.  
 
  아이들은 여전히 지영에게 못생겼다고 했다. 그렇지만 상헌과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있은 다음부턴 못생겼다는 말이 조롱투에서 친밀감의 표현으로 바뀌었다. 상헌은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도 범접 못할 아우라가 있었다.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 없는데도 태권도가 3단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헌이가 만나는 지영이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일진 패거리들이 상헌을 삐딱하게 쳐다보곤 했으나 시비 걸지 않았다. 상헌과 지영, 소라는 자주 함께 다녔으며 급식 시간이 겹치는 날엔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곤 했다.

  작년에는 지동이를 학교에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험날이었다. 엄마는 아침에 귀가하지 않았고 두 살 된 지동이는 돌봄이 필요했다. 무작정 학교에 지동이를 데리고 온 지영은 담임에게 지동이를 맡겼다. 담임은 당황했다.      


  “아니, 샘은 바로 시험감독 들어가야 돼. 애 볼 시간이 없다고.”
 
  이미 지동은 담임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담임은 부랴부랴 고사계에 시험감독 시간을 조정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지동을 데리고 여교사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에 모여있던 여교사들이 지동을 보고 한 마디씩 보탰다.
 
   “얘는 누구? 김샘 숨겨 놓은 아들? 아이고 잘 생겼다... 애가 참 순하네...”
   “그게 아니고요. 우리 반 지영이라고 그 친구 동생이에요...”
   “그래요? 걔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동생을 학교에 데리고 올 생각을 한데요...”
   “예 뭐... 집안 사정이 좀 그래요. 자 지동아 이 온...”
 
  두 과목 시험을 치르고 나온 지영은 지동을 찾으러 왔다. 교무실의 모든 교사들이 진풍경을 보았다. 지영은 익숙하게 지동을 받아 안고는 허리를 숙였다.
 
   “샘, 감사합니다. 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럼 가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학교를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그날 지영은 늦게 귀가한 엄마를 놓고 야단을 쳤다. 내가 지동이 학교 데리고 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느냐고,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훈계를 했다. 겨우 열아홉 살 더 먹은 엄마는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로 엄마는 술에 취해 들어왔을지언정 새벽까지는 들어왔고, 지영이가 학교 간 이후 지동이를 보았다. 그래봤자 사고만 나지 않게 살피는 수준이었다. 지영은 그것만도 어디냐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우릴 버리지 않았으니까. 제시간에 들어와 주는 것만이라도 해주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가끔 주는 생활비는 지영에겐 생명줄과 같았다. 지영이는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힘들다고 내색을 하면 엄마도 미안해할 것이고, 동생들도 불편할 테니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끔 설움이 복받쳐서 혼자 소리 죽여 울 때도 있었지만 평소엔 그러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영에게는 특유의 낙관이 있었다. 그냥 ‘잘 될 거야’를 되뇌면 시간이 지나갔다. 지동이도 작년보단 올해 돌보기가 쉬워졌고, 지수도 자기 혼자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반찬과 함께 먹을 줄 아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힘들었지만 살만했다.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가끔씩 공부를 잘했으면, 얼굴이 좀 예뻤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지영이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공부할 시간은 거의 없었고, 책만 들여다보면 바로 잠이 쏟아졌다. 지영은 공부는 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 좀 하는 애들이 부럽긴 했지만 따라 할 자신은 없었다. 말하자면 지영에겐 미래의 꿈보다 당장의 생활이 급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영이만 바라보는 두 동생을 생각하면 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사치스런 일이었다.


  상헌이가 지수를 통해 저녁을 먹자고 알려왔다.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지수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마침 저녁 준비를 할 참이었다. 지영은 지동이와 함께 초원식당으로 갔다. 소라는 엄마와 쇼핑을 가야 한다면서 오지 않았다. 상헌과 지영, 그리고 두 동생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상헌은 관장님이 오늘 용돈을 주셨다면서 삼겹살을 먹자고 했다. 지수와 지동은 좋아라 했다.

  상헌이 가장 싫은 하는 것은 혼자 먹는 밥이었다. 한 번 일감을 잡아 지방으로 내려가면 보통 보름씩 집을 비우는 아빠였기에 평소엔 아침을 먹지 않고 점심은 학교 급식으로 때웠으며 편의점 김밥이나 어묵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상헌 입장에서는 자기와 저녁을 함께 먹어주는 사람이 너무 고마웠다. 관장님이 가끔 사주는 저녁도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 때문에 더 맛있었다. 아빠도 가끔 생활비를 던져주고 가지만, 관장님도 용돈을 주고, 저녁도 함께 먹어주니 고마웠다.

  상헌이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때 훅 하고 들어오는 김 때문에 기침을 하게 되면, 문득 허무했다. 열다섯 상헌이에게 혼자 먹는 밥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어떤 날은 라면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라면 국물과 눈물이 섞여 짠 맛이 더 진했다. 관장님은 잘 먹어야 운동 능력도 좋아진다고 매일 입버릇처럼 말했다. “관장님도 매일 혼자 식사해 보세요. 먹고 싶나.” 이렇게 말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 왜 자기를 걱정하는지 알기 때문에도 그러했다.

  한 달에 두어 번 지영이와 동생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 가족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하면서 상헌도 맛있게 고기와 밥을 먹었다. 초원식당의 사장은 단골이 된 이들에게 고기나 밥, 반찬을 계속 추가해 주었다. 밥 먹는 모습이 어찌 그리 이쁘냐고 하면서 어떨 땐 만원 짜리 한 장을 지동이의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밥과 고기를 먹고 나니 네 명 모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표정이 됐다. 넷은 식당을 나와 지영의 집으로 향했다. 빌라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골목을 지나 맨 끝 반지하집에 이르렀다. 그러나 넷 모두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반지하 지영의 집을 지나쳐 걸었다. 동네에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오래 자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면 온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끔 지영이가 올라와 동네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던 그 자리였다.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깔렸다. 갑자기 지영이가 말했다.
 
   “우리 춤출까?”
    “누나 왜 그래? 미쳤어? 난 싫어... 형은 좋아?”
 
  지수는 뜬금없는 누나의 제안에 놀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영이 휴대폰에서 노래를 틀었다. 요즘 학생들이 많이 듣는 걸그룹의 댄스 뮤직이었다. 지영이는 휴대폰을 지동이에게 넘기고 서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어둠 아래서 지영은 점점 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따라 움직였다.


   “에라 모르겠다.”
 
  지수는 휴대폰의 플래시를 켜서 지영을 향해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몸을 움직여 춤을 추었다. 지동이도 음악이 나오는 휴대폰을 좋아라 흔들며 앙증맞은 몸을 움직였다. 상헌은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지영의 춤이 격렬해졌다. 가끔 소라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때 유심히 보아 두었던 동작을 그대로 재현했다. 숨이 가빠오고 땀이 솟았다. 지영에게는 모든 소음이 거세된 음악 소리만 들렸다. 지영의 춤을 보고 있던 상헌도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헛, 이얍!”
 
  한 번도 춤을 춰본 적이 없는 상헌은 태권도의 품새를 하고 있었다. 태극 일장부터 시작하여 동작 하나하나를 절도 있게 이어 갔다. 지수도 춤을 추다 품새를 따라 하다 신이 났다. 지동이도 손발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격렬하게 춤을 추는지 지영의 온몸이 땀에 젖었다. 상헌은 품새의 동작이 고난도가 될수록 자세를 엄격히 지키고 중간중간 주먹을 내지르거나 앞차기, 옆차기를 하며 기합을 넣었다. 상헌은 지금껏 해본 품새 중 가장 진지하게 몰입했다.

  눈을 질끈 감고 춤을 추던 지영이 눈을 떴다. 상헌과 두 동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동생들도 따라 웃었다. 지영은 멈추지 않고 춤을 추었다. 새벽에 귀가하는 엄마의 얼굴이, 뭉개져 형상을 알 수 없는 어느 아빠의 얼굴이, 상헌과 소라, 그리고 담임샘, 두 동생의 얼굴이 스쳤다. 매일 동생에게 아침을 챙겨 먹이고, 수학 시간만 되면 깊은 잠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도 스쳐갔다. 지영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동네 언덕배기의 기묘한 축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네 사람은 오래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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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지훈이의 캔버스> 중 첫번째 꼭지인 <춤을 추다>를 끝냈다. 지영이를 더는 힘들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의 간청도 있었고, 뭔가 반전이 있을 것 같아 불안하다는 걱정도 있었다. 제목이 <춤을 추다>인 이유는 마지막 단락에서 해명하였다. 우리 곁의 모든 지영이가 더는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훈이의 캔버스>는 '연작소설'의 식을 의도하고 있다. <춤을 추다>에서 등장하는 지수는 지훈이로 이름을 바꿀 예정이다. <지훈이의 캔버스>에서 지훈이는 지수가 몇 년 더 성장하여 사춘기가 되었을 때를 그린다. <시발 롤모델>의 민 교사는 <춤을 추다>에서 지영이의 담임이자 수학 선생이었다. 연작 마지막 편 <소라의 꿈>의 소라는 <춤을 추다>의 바로 그 소라다. 지영이의 베프이자 늘 유쾌했던 소라가 꿈을 갖는다. 그 꿈은 행복한 꿈일까, 삶의 나락에서 평화를 구하는 꿈일까. 아직은 모른다.


 글은 연작소설을 표방하지만 시점을 통일하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도 있지만 '일인칭, 삼인칭 관찰자 시점'도 있으며 심지어 '무생물 독백 시점'도 있다. 하나 하나의 꼭지는 독립적이되, 등장인물의 상당수는 다른 꼭지에서 동일 인물로 나온다.


이런 파괴적 작법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럴 때만 온전히 우리 곁의 지영이를 보고, 느끼고, 연민하며, 궁극적으로 나의 문제로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아주 작은 울림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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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에피소드, 시발 롤모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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