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에서 긴장감이 뿜어져 나왔다. 교실 안에는 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불과 십 여분 전의 일이었다. 수업의 진행을 가로막은 사소한 소란은 복도 쪽 자리에서였다. 두 명의 학생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은 채 손에 권투 글로브를 끼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민 선생은 간단하게 주의를 주었다.
"수업과 관계없는 물건은 가방에 넣어라."
그러나 아이들은 교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을 이어갔다. 교사는 천천히 아이들의 자리로 갔다.
"너희들의 장난으로 수업이 힘들구나. 권투 글로브는 나에게 잠시 보관하거라. 그리고 수업을 하자."
"안 되는데요."
권투 글로브를 잠시 보관하자는 교사의 말에 이들은 노골적으로 저항했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글로브를 수학 선생에게 넘겨주기 힘든 사정이 있거나. 막상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민 선생은 재차 요구했다. 권투 글로브를 보관하려는 민 선생과 빼앗기지 않으려년 아이들 간에 힘 겨루기가 시작됐다. 교사와 아이들은 글로브의 한쪽 씩을 잡고 잡아 당겼다. 그때였다. 운동장 쪽 자리에서 한 학생이 일어섰다. 한쪽 다리에 스테인리스 보조기를 장착한 아이는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민 선생 쪽으로 다가왔다.
"잠깐만요. 그건 제 것인데요. 저한테 돌려주시죠."
민 선생은 침착하게 말했다.
"네 것이겠지만, 이 아이들이 수업시간 중에 그것으로 장난을 쳐서 다른 친구들의 수업을 방해했으므로 잠시 보관하고 수업을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아이는 기어코 권투 글로브를 자기 손에 넣었다.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완강한 태도였다. 남은 수업은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지나갔다. 끝나는 종이 울렸다. 수업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그 아이가 벌떡 일어서서 민 선생을 돌려세웠다. 아이는 보조기를 찬 발을 소리 내어 딛으면서 교탁 앞으로 왔다. 아이가 말했다.
"이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란 말이에요! 그걸 샘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압수하려고 해서 나는 자존심이 완전히 상했어요. 지금 내 마음은 심히 불쾌하다구요. 정중하게 사과하세요. 지금 당장!"
녀석은 교사를 향하여 거칠게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는 교사를 막아섰다. 정말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으면 교실을 나갈 수 없는 분위기였다. 주변에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녀석이 소리쳤다.
"야, 이 씨발년들아. 구경 났어? 꺼져!"
여학생들은 조금 물러섰지만 이 흥미로운 볼거리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의지로 더러는 팔짱을 끼고 더러는 책을 챙기면서 귀를 세우고 사태를 예의 주시했다. 교사는 아이를 향하여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너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내 앞에서 학생들에게 욕설을 하는 것은 학생들에게도 잘못된 일이지만 동시에 나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이다. 일단 길을 비키거라. 나는 교무실로 가야겠다."
"아니요, 사과하기 전엔 샘은 이 교실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요."
녀석은 출입문을 막아섰다. 민 교사는 현기증을 느꼈다. '뭐지? 이 상황은. 교직에 들어온 지 27년 만에 가장 어려운 사태를 맞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또한 이 상황을 어떻게 잘 극복해야 할지에 대하여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많은 생각이, 무엇인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이 짧은 시간에 민 선생의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사과할 일이 없고, 오늘 내가 본 네 행동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책임을 묻겠다. 이제 길을 비켜라. 사태를 크게 만들지 마라."
"아뇨! 절대로 샘은 여길 나갈 수 없어요. 사과하기 전에는! 나를 만만히 보지 말아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선생 둘을 잘랐다는 사실을 아세요? 샘 실수하는 거예요..."
녀석의 표정은 긴장으로 가득 찼다.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자, 이제 길을 비켜라. 이건 교사로서 내 공식적인 지시다. 난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 하고, 네가 잘못한 것에 관해선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될 거다."
"아, 그러세요? 샘이 여길 그냥 나가면내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아이들 앞에서 망신 준거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거라구요. 그래도 사과를안 하고 나가신다구요?"
참으로 오랜만에 강적을 만났다. 교실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학생들은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아이는 사과를 받아내기가 힘들어지자 한 걸음 더 들어왔다.
"샘은 모든 아이들이 지켜보는 데 제 인격을 심각하게 무시했어요.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구요!"
"난 네 인격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젠 길을 비켜라."
"아니 무시하지 않았다구요? 그건 샘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구요.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게 기준이라구요! 샘은 법도 몰라요?"
아마도 피해자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말인 듯했다. 나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천천히 말했다.
"글쎄 내가 아는 법과 네가 아는 법이 다른 모양이지. 나도 분명히 다시 한번 말하겠다. 난 너를 무시한 적이 없고, 너는 내 지도에 불응했으며 나의 정당한 교육활동을 방해하였다. 난 교칙에 따라 네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길을 비켜라."
녀석은 점점 더 흥분했다.
"뭐라구요? 무시를 안 했다구요? 얘들아 다 봤지? 샘이 나를 무시하지 않았단다..."
그때 맨 앞에 앉은 여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 말이 없고, 배움이 더딘 아이였다.
"맞아요! 선생님이 먼저 쟤를 무시했어요. 사과하는 게 맞아요!"
순간 민 선생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이들은 비로소 흥미의 절정이라는 듯 더욱 주변에 몰려들어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민 선생의 머릿속에 교직 27년의 여러 우여곡절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에 이런 일을 당했던 적이 있었나. 그때 난 어떻게 대처했었지. 오늘 이 경우는 분명히 교사에게 닥친 어려운 시험이었다.
눈치로 보아 몇몇 아이들은 민 선생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드러내 표현하지 않았다. 그보다 많은 아이들의 눈은 흥미로운 볼거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최근 들어 아이들이 교사의 권위를 침해했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어 보았지만 직접 당해보니 민 선생도 지혜로운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자, 난 교무실로 가겠다. 지금부터 네가 나를 막든, 어떤 말을 하든 내 진로를 방해한다면 나는 규정에 따라 다음 행동을 하겠다."
"다음 행동을 취하시죠.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깐...."
민 교사는 쉬는 시간 10분을 다 보내고 나서야 아이들을 뒤로한 채 교실을 나왔다. 교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긴장했던 몸에서 정기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녀석의 확신에 찬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만약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거나 욕을 했다면 바로 아동학대 혐의자로 신고를 당했겠지. 그나마 끝까지 화를 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인가. 아니면 학생과 들러붙어 싸우기라도 했어야 할까. 여러 잡념이 민 선생을 서글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