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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Oct 07. 2024

시발 롤모델(3)

아이는 사과하지 않았고, 교사는 정리하지 않았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아이는 민 선생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민 선생 역시 정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사건을 알고 있는 동료 교사가, 아빠에 대한 반감을 비슷한 또래의 남자 교사에게 표출했다는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단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민 선생은 잘 알고 있었다.


  민 선생은 초여름부터 '가우스 반' - 수학 교과에서 배움이 더딘 아이들을 따로 편성한 반 - 을 맡았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에 한동안 그 녀석을 볼 수 없었다. 간혹 복도에서 마주쳤지만 아이는 인사하지 않았다. 교사 역시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렇게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의 질풍노도기를, 교사는 교직 중년의 고단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소한 궁금증이 풀렸다. 아이가 거칠게 고사에게 사과를 요구할 때 거들었던 그 여학생은 어떤 의도로 "맞아요. 선생님이 먼저 쟤를 무시했어요. 사과하셔야 돼요"라고 말을 했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 말이다. 그 반 아이들의 지나가는 전언에 따르면 둘은 '사귀는 사이'였다. 교사를 향한 남자 친구의 분노에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한 것이었다. 민 선생이 별도의 교실에서 배움이 더딘 아이들과 공부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다. 녀석도 다친 발이 다 나았는지 더는 보조기를 차고 철컹철컹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전히 가끔 복도나 운동장이나 식당에서 마주쳤지만 그뿐이었다. 


  오랜 경력은 견디는 힘을 주었다. 사건 초기와 달리 민 선생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견디지 않았다. 의식적으로도 일상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민 선생은 그렇게 해야 여러 아이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 아이에게도 교사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을지 모른다. 물론 민 선생 혼자의 생각일 수 있지만 말이다.


  중학교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겨울방학을 지내고 온 아이들이 한 뼘이나 커진 키로, 때로 더 굵어진 목소리로 교실과 복도를 활보하며 특유의 에너지를 내뿜었다. 그 녀석도 키가 자랐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갔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3월의 학교는 분주했다. 하는 일이 많아서 바쁘기도 하고 하는 일 없이 바쁘기도 하다. 많은 교사들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민 선생은 이 학교에서 5년 근무 마지막 해에 찾아오는 '비담임 안식년'이라 담임은 맡지 않고 3학년 수학 교과를 전담하게 됐다.


  첫 수학 시간이었다. 민 선생은 교실에 들어가 교탁 앞에 섰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수업방법과 평가계획을 일러줄 참이었다. 갑자기 복도 쪽 자리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들려왔다.


  "아... 시발... 최악이네. 최악이야"


  그 녀석이었다. 그는 다시 민 선생과 함께 1년 동안 수학 공부를 해야 할 처지가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 선명하게 민 선생의 귀로 전달이 됐지만 못 들은 체했다. 그 말을 들었다 해도 달리 무슨 방도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수업 첫날부터 갈등하는 모습이 연출된다면 일 년 내내 힘들 것이 뻔했다. 그러나 녀석이 말이 귀에 닿는 순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수학 시간은 흘러갔고, 오후에 동아리 배정을 했다. 민 선생은 이 학교에서 몇 년 간 걷기반 동아리를 맡아 운영했다. 평소 즐겨 걸었던 민 선생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과 걷는 것이 좋았다. 한 번에 오천 원 남짓 들어가는 동아리 활동 비용을 내기가 어렵거나, 혹은 그게 아깝거나, 소수는 살을 빼려고, 극소수는 정말로 걷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걷기반에 들어왔다.


  실내 체육관에 걷기반을 희망한 아이들이 안내를 받기 위해 모였다.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이 반에 들어온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지도교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민 선생은 혼자 생각했다. 민 선생은 수업이든 동아리든 '아직은 학교에서 내가 필요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더 나이를 먹으면 아이들은 나를 찾지 않겠지. 그렇지만 어쩌겠나 받아들여야지. 몇 해 더 근무하면 명예퇴직이 가능한 경력이 되니 그때까지만 별일 없이 버티면 돼'라고 생각했다. 씁쓸한 다짐이었다.

  걷기반 동아리를 신청한 아이들의 명렬을 정리하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 녀석이었다.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민 선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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