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선생은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깊은 회한이 밀려왔다. '오늘난 교육적으로 행동한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있을 사태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알리바이를 세워 놓은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오늘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온갖 잡념이 민 선생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책상 위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그는 '선생 노릇 참 오래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교무실 창 밖에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담임교사에게 즉시 이 사실을 전해줘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교사는 망연자실 목련에 눈길을 주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교정에는 봄 기운이 완연했지만 아직 실내 공기는 서늘했다. 민 선생은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 앞에 섰다. 수도 꼭지를 트니 찬물이 나왔다. 손을 닦기 위해 수도 꼭지 밑으로 넣었다. 손이 아려왔다. 얼굴을 닦았다. 거울 속에는 물 묻은 얼굴의 오십을 넘긴 중년의 교사가 지친 모습으로 서 있다. 27년 동안 - 그 가운데 5년은 해직이 되어 거리의 교사로 살았고, 2년은 공부하느라 학교 밖에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 민 선생을 힘들게 했던 것은 그가 가르쳤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여섯 학교에 근무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교장과 교감, 그리고 생각이 많이 다른 일부 동료 교사들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동안 그가 고민해 왔던 것은 어떻게 하면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학교를 바꾸어 좋은 교육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 것인가였다. 교사에게 무례하게 구는 아이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있었다.'적어도 나만큼은 아이들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라는, 자만이 부른 사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교실붕괴 담론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문제나 가정 혹은 친구 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경우 민 선생은 상담자, 중재자이자, 아이가 기댈 언덕이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온 결과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거울 속의 오십대 교사는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다. 그동안 아이들과 있었던 여러 추억들이 낡은 영화의 장면처럼 눈앞을 스쳤다.
담임교사에게 오늘 그 반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담임교사 역시 이 아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화 과정에서 몇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는 별거 중인데, 현재 엄마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아이는 아빠를 매우 증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교사 두 명을 잘랐다는 아이의 이야기 역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아이 수준에서는 그렇게 떠들고 다닐만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했던 수영강사가 있었는데 연이어 두 명의 수영강사와 아이 간의 트러블이 있었고 결국 그 직을 면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담임교사도, 수영강사도 '샘'이라 불렀을 테니 선생 2명을 잘랐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교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작년, 그러니까 아이가 1학년 때 있었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학급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여학생이 있었다. 이 녀석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 여학생의 사물함 안쪽 벽에 실핀 여러 개를 촘촘하게 박아 두었다. 여학생은 사물함 안에 있던 책을 꺼내다가 손등을 긁혀서 피가 많이 났다. 그래서 이를 두고 부모를 불러 상황을 알리고 징계를 논의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괴롭힘을 당하던 여학생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고, 이 아이는 반성문 한 장 쓰고 2학년으로 진급하게 된 사건이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아이의 담임교사였다.
"어떻게... 사과를 받으시겠어요? 지금 아이의 어머니가 수학 선생님에게 사과를 하시겠다고 하는데..."
교사는 지금 사과를 받고 말고 할 기분도 아니거니와 이 상황이 누구의 잘잘못으로 가려질 문제가 아니라는 나름의 생각, 그리고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부모 방문, 사과, 그리고 마무리가 되는 절차와 수순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사과는 무슨, 어머니는 보내드리세요. 부모가 사과해서 될 문제라기보다 이건 결국 나와 아이의 문제이니 그렇게 풀어야죠.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간이 지나 담임교사는 부모와의 면담 결과를 알려왔다. 아빠의 부재 상황에서 아이를 혼자 키우기가 무척 힘들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앞으로 더 신경 써서 돌보겠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한 가지 언급이 특히 귀에 들어왔다. 평소에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기를 누군가와 다툼이 생겼을 때 네가 잘못한 일이면 사과를 하고, 상대가 잘못한 일이면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 사건을 교사와 학생의 '다툼'이라고 생각했구나. 아이는 엄마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했던 것일까. 다툼에서 잘잘못은 누가 판단을 하는 거지? 민 선생은 그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