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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미 Jul 09. 2021

prologue.엄마의 인생 졸업식

불현듯 찾아와 버린, 독립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다녔던 4년 정도를 제외하고 30년을 넘게 엄마와 함께 살아왔으니, 더할 나위 없는 가장 소중한 나의 동반자가 바로 우리 엄마였다.

늘 옆에 같이 있었고, 언제든 전화하면 딸과 엄마답지 않게 무한 수다를 떠는 재미가 쏠쏠했다.

주변에서는 친구 같이 편하고 스스럼없는 모습이 부럽다고도 했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를 만날 것이 뻔한데도 매일 저녁 퇴근할 때는 어김없이 전화를 했다.

식당을 하던 엄마는 그런 나에게 매일 똑같이 "저녁은?"이라고 질문했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반복되는데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습관처럼 버스에서 내리면 엄마 번호를 눌렀다.


# 잘 가, 엄마


어느 날인가, 퇴근하면서 버스에서 전화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더 이상 전화를 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순간에. 너무 슬퍼서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엄청 울었다.

버스 창 밖에 붉게 달아오른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고, 길 가다가 엄마랑 사 먹었던 계란빵이나 떡볶이와 같은 음식들이 보였을 때, 신기하거나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했을 때...

더 이상 이런 소소함을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사실에 상실감이 밀려왔다.

한 번은 너무 슬퍼서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물론 엄마와의 이별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18년 1월 1일, 암 선고를 받은 엄마는 바로 입원해서 항암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심각했었다.

모두가 기쁘게 맞이했을 새해 첫 날을 엄마와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산 송장처럼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바로 응급실로 향했던 그날이 생생해서,

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 항암치료를 받을 때 암의 크기를 다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졌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에 잠시 마음을 놓았던 것 같다.


몇 년 동안 식당을 꾸리며 일에 매진해오던 엄마의 몸은 생각보다 많이 약해져 있었고,

끝내 항암치료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항암치료를 못하던 시간이 늘어가면서,

엄마의 몸에 있던 암 덩어리는 거세게 자신의 할 일을 하며 더러운 성깔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마지막에 엄마의 배는 임신한 사람처럼 한 없이 커져있었다. 암 덩어리였다.


한 달 남짓. 어쩌면 한 달도 채 못 사실 수 있어요.


병원에서 담당 의사에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도무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누군가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였다.

동생은 이미 눈물바다였다. 어른이 없는 집안에서 살아온 내가, 내가 이 집에 우리 가족의 가장이었다.

엄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하루빨리 신변을 정리하도록 도와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엄마의 마지막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엄마의 병원 침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엄마 등 뒤에 얼굴을 기대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엄마, 우리 이제 병원 나가도 될 것 같아.

- 의사 선생님이 치료 못하겠대? 집에 가래?

- 응 엄마 치료 다 했대.

- 얼마 안 남았다고 그래?

-.....

-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

- 우리 되게 재밌게 잘 살았지? 그렇지? 엄마는 너무 행복했어. 그럼 됐지.

- 엄마.... 미안해...

- 네가 할 것들이 많을 텐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 엄마..... 진짜 너무 미안해...


그 대화가 엄마와 마지막에 가장 길게 한 대화였다.

엄마는 이제 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 대화를 끝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24시간 맞고 있는 모르핀의 양은 늘어만 갔고, 추가

진통제 주사의 간격은 점점 줄어들었다.

원래는 동생 내외가 살고 있는 대전의 요양원으로 모셔가려고 했었는데, 도저히 장거리로 움직일 수 있는 컨디션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병원 1인실로 엄마를 옮겼다.

밤마다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면서 주변 다른 환자들에게도 영향이 있을까 싶어서이기도 했고, 엄마가 좀 편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1인실로 이동했을 때 엄마는 대전에 온 거냐고 물었다. 엄마의 정신은 이미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나를 위해 교대를 해준다고 동생이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엄마는 거의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고, 암덩어리가 크게 불어나 거의 7-8kg 정도 몸무게가 늘어나 있었던 터라 요령이 없는 동생은 엄마의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간병은 힘이 세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날은 동생과 1인실에 같이 있어주기로 했다. 이것저것 방법을 알려주기 위한 요량이었다.

늦은 시간에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 옆에서 동생과 나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떠들었고,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동생은 언제나처럼 옛날 고리짝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어이없어서 웃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나와 동생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셋이 있어서 너무 좋네"라고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엄마가 마지막에 쥐어짜 내뱉은 한 마디였다.


# 엄마를 떠나보낸 자리에는 후회만이.


엄마를 보내고 문득 생각해보니, 대학교 졸업식에 엄마가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 대학교 근처에 엄마와 이혼한 아빠의 가게가 있었는데, 아빠가 부득부득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한테 어색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혹시나 아빠가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게 너무 창피했으니까.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졸업식에 못 오게 했다.

대신 내 오랜 친구들이 자리를 지켜줬다.


이따금 엄마는 한 번씩 이야기했다.

나도 딸내미 졸업식 가서 학사모 쓴 사진 한 번 찍어보고 싶었다고.

남들처럼 딸이랑 같이 학사모 쓰고 찍은 사진 있었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까지 16년이라는 시간을  교육을 위해 힘썼다.

특히 대학교 입학 전에 아빠와 이혼을 하면서 내 대학시절 서포트는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나만 생각했던 순간의 판단이, 내 결정이 잘못된 거였다. 이토록 후회스러울 줄이야.

살아가면서 많은 후회를 하고 살겠지만, 엄마에 대한 내 후회는 그거였다. 학사모를 못 씌워드린 거.


사실 엄마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먹고사는 게 바빠서 남의 집 일을 했다고 한다. 10살 때부터.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우리 엄마 나이가 60-70 정도 되는  알지만, 고작 50대였다.

인생의 시작이라는 60대의 찬란함도 만끽해보지 못한채 그렇게 저물었다.

엄마는, 조실부모에 남편도 없었고, 가족력으로 형제들도 일찍 돌아가셔서 의지할 가족도 없었다.

엄마는, 대단히도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런 엄마에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엄마의 인생 졸업을 축복합니다.


어느 날 동생의 꿈에 엄마가 나왔는데,

동생에게 자신은 여행을 다니고 있으니 너무 좋다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어렵게 여권을 만들어 놓고 중국밖에 못 가봤다고,

가게 융자를 다 갚으면 실컷 좋아하는 여행을 다닐 거라고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랬던 엄마가 동생의 꿈에서 진짜 여행을 다닌다고 이야기했으니 이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으랴.


엄마가 옆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슬프지만

힘든 기억을 잊고, 온전한 엄마 한 사람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하면 마음이 개운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인생 졸업 기념으로 마음껏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뭐 애써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노력일 테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엄마는 이제 가보고 싶어 했던 곳들을 다 돌아보고 있을까?

장가계를 정말 가고 싶어 했었는데, 지금은 장가계 정상에서 세상을 발아래 두고 즐기고 있겠지.

나중에 만나게 되면 꼭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럼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엄마는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러 간 것이리라.
그리고 몇 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훗날 나의 졸업식에 엄마가 꼭 와주길.
엄마의 인생 졸업을 축복하며.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아프지 않은 시간 속에서 온전히 행복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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