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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미 Aug 17. 2021

딸, 알파벳 좀 한글로 써줘

컨셉진스쿨-8월 에세이 프로젝트 #8. 학교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 중학교도 없다. 초등학교도 없다. 어려운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항상 나에게 뭘 하더라도 졸업장만 있으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졸업장만 있어도 어디 가서 기죽고 살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 한 마디에 많은 인생이 함축되어 있겠지 싶다.


초등학교 때 엄마와 아빠의 학력을 적어서 내야 했다. 엄마가 '중학교 졸업'이라고 작성해서 준 서류를 보면서 내가 '고등학교 졸업'인데 잘못 쓴 것 같다고 고쳐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도 엄마에게 상처였겠지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여진다.


한 번은 엄마가 영어 알파벳을 한글로 써달라고 했다.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면서 엄마에게 읽기 쉽게 큰 글씨로 밑에 적어줬다. 사실 그때 내색을 최대한 안 하려고 노력했지만 속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엄마가 영어 알파벳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이거 다 읽을 줄 알면서 갑자기 왜 궁금해하냐고 묻자 엄마는 "아는 척한 거지"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엄마가 참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여러 가지로.


나이가 많이 들어서 30살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술 마시면서 엄마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검정고시를 준비해보보지 않겠느냐고. 내가 이제는 돈도 벌어서 엄마 공부할 수 있게 다 지원해 줄 수 있다고. 엄마는 대답은 'NO'였다.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나이만 누려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이랑 간식을 사 먹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그런 일상을 보냈다면 삶이 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좀 일찍 철이 들었다면 엄마의 힘든 것도 이해하고, 눈치껏 행동했을 텐데. 갑자기 학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아침마다 짜증을 내던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리움과 소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컨셉진스쿨 - 8월 에세이 프로젝트 https://conschool.imweb.me/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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