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셋째 주 수요예술회
전시회 :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장소 : 학고재 갤러리
기간 : 2021. 2.17 ~ 4. 3
여성독립운동가라면 자연스럽게 유관순을 떠올리는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이름이 낯설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과 함께 독립투쟁을 했지만 오랫동안 잊혀지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는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와 설치작 <붉은 방>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윤석남은 채색 여성 초상화를, 소설가 김이경은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14인의 독립투쟁을 소설 형식으로 각색하고 소개하는 글쓰기 작업을 맡았다.
초상화와 대형 인물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을 참고하여 초상화를 그린 후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배경과 몸짓을 구상하여 대형 인물화를 그렸다고 한다. 작업의 과정을 함께 보는 묘미가 있다. 특히 작가는 눈을 통해 내면의 기운이 전달된다고 생각해 강렬한 눈의 묘사를 중요시 여겼고, 실행 수단으로써의 손을 중요하게 묘사하였다고 한다. 전시를 보는 내내 강렬한 눈과 크게 강조된 손에 매료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은 타자의 존재 방식이자 나와 타자와의 정신적 교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얼굴 중 특히 눈을 통해 내면의 기운이 전달된다고 생각해 항상 생생하고 강렬한 눈의 묘사를 중요시 여겨왔다. 얼굴 다음으로 손은 실행 수단으로써 크고 중요하게 묘사된다.
박자혜 1895-1943
"나는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중에서
박자혜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로 전시가 시작된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아내로 1919년 3·1 운동 당시 간호사로서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하였고,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남편의 죽음에 슬픔과 분노가 차오른 표정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정정화 1900-1991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회고록 <장강일기> 중에서
정정화 독립운동가는 1919년 상해 망명 후 1945년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을 수행했고, 남편 김의한 지사와 함께 부부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안경신 1888-?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방법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무력적인 응징-투탄, 자살, 사살-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효할 것으로 믿는다. 오늘의 사태를 해결하는 길은 독립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우리가 취할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무력적 응징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에게 한 말
냉철한 눈빛, 강단이 넘치는 독립운동가의 선언문과 무기를 움켜쥔 손을 보고 있자니 여자들의 강인함을 흠뻑 느낄 수 있다.
남자현 1872-1933
"내 가진 돈은 모두 249원 80 전이다. 그중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축하금으로 바치거라.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자손에게 똑같이 유언하여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해라. 남은 돈의 절반은 손자를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친정의 종손을 찾아 공부시키도록 해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 임종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
남자현 독립운동가는 영화 '암살'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실존 모델이다. 유학자 집에서 태어나 남편이 의병으로 전사하자 자식을 혼자 키웠다. 3·1 운동 직후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1933년 일본총독 암살을 시도했다가 거사 직전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국제연맹조사단에 '조선독립원(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와 함께 자른 손가락 마디를 보내기도 했다.
박차정 1910-1944
"우리 조선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방으로 인권이 유린되어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전통적 속박에 의한 가정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략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 1936년 결성한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중에서
일제 치하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유린되어온 여성의 인권 해방에 대해 강하게 울부짖었던 여성독립운동가 손에 총이 쥐어져 있는 게 인상적이다.
이화림 1905-1999
"끝까지 혁명의 길을 걷겠다고 결정한 이상 작은 가정에 연연할 수는 없었다. 비록 희생이 뒤따랐지만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었다. 평양을 떠나고 어머니를 떠나면서 나는 이미 희생을 치렀다. 나는 이미 이 길에 올랐고, 후퇴할 이유도 없으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이화림 회고록> 중에서
권기옥 1901-1988
"어린 마음이었지만 항일투쟁에는 무조건이었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날며 왜놈들을 쉽게 쳐부술 수 있는 비행사가 되려고 마음을 다졌지요."
- 1961년 7월 인터뷰에서
이 시대의 여성 조종사라니? 놀라운 사실이다. 권기옥 독립 운동가는 1932년 일본 총독부와 일본 황궁을 폭파하겠다는 결심으로 상해 전투에 참가하였다.
강주룡 1901-1932
"...2천 3백 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가장 큰 지식은, 대중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란 겁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끝까지 임금 인하를 취소하지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 착취에 신음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 강제로 끌어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 1931년 5월 29일 을밀대에서 강주룡이 한 연설
김옥련 1909-2005
"해녀 투쟁할 때 잡혀갈까 안 무서웠어요?"
"무서운 게 없어. 이 조그마한 몸이 바쳐가지고 우리나라가 독립된다면 내가 목숨을 바치겠다 해서 굳은 결심을 해서 해놓으니까 무서운 거 하나도 없었어요."
- 2003년 인터뷰에서
김명시 1907-1949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은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두 살까지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적지구에서 싸우던 눈물겨운 이야기, 임신 중에 체포되어 배를 맞아 유산하던 이야기, 밤에 수심도 넓이도 모르는 강물을 허덕이며 건너가던 이야기(...) 싸움이란, 혁명에 앞장서 싸우는 것이란 진실로 저렇게 비참하고도 신명 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서 나왔다.
- <독립신보> 1946년 11월 21일 자 인터뷰 기사
김마리아 1892-1944
"너는 왜 대일본제국의 연호를 쓰지 않는가?"
"나는 일본 연호를 배운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너는 언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생각해 왔는가?"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는 남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심문과 재판 진술 중에서
김마리아 독립운동가는 교육자이자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선언문을 기모노 속에 숨겨 국내로 들여와서 3·1 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한 인물이다. 이 일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고질병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일을 했다.
정칠성 1897?-?
"내가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이란 오로지 조선 여성을 위해서이지만 글로써 발표한 것이나 말로써 부르짖은 것이나 모두 조선의 여성에게 각성하라는, 현실을 잘 파악하는 여성이 되라는 것뿐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가장 현실을 잘 알고 현실을 똑바로 보는 사람이 되라는 것뿐이었지요."
- 1935년 <삼천리>에 실린 "여류문장가의 심경 타진" 중에서
박진홍 1914-?
"십 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 그래서 이따금씩 꿈을 그리다가 현실 앞에 깜짝 놀라곤 해요. 가정은 민주주의적이긴 합니다. 서로 다 혁명운동에 이해가 있지요. 그러나 집사람도 봉건 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어요. 내가 무얼 쓰면 여자가 저런 걸 쓴다고 퍽 신기하게 여겨요."
- <독립신보> 1946년 11월 14일 자 인터뷰 중에서
<붉은 방>은 칼로 오려낸 종이 콜라주로 빨갛게 벽을 가득 채웠다. 바닥에는 나무에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그려 넣어 세워두었다.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으나 조명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1885-1918
"1915년 별목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나는 목재 창고 근처에서 중키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노동자들은 그가 러시아어,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이라고 수군거렸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라 김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노동자들을 대했고 사업주 앞에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때문에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모든 점에서 그를 신뢰했다."
- 러시아의 우랄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노동자 김시약의 회고
윤석남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내로, 딸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던 중 40세가 되던 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전시부터 어머니와 여성을 주제로 여성의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그렸고 그 이후 40여 년 동안 여성에 대한 작품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82세의 작가는 100인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완성해서 여성의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현재 22개의 초상화를 완성하여 학고재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14인의 초상 외 온라인 갤러리에서 여성독립운동가 8인의 초상을 볼 수 있다. 2-3년 안에 100인의 초상을 그리는 게 목표라며 본인의 건강을 기원하는 사명감과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다운 면모에 감동을 받은 전시였다. 또한 기억하리, 여성독립운동가들을.
학고재 온라인 갤러리
http://online.hakgojae.com/viewingrooms/view.php?exh=7
BK 한줄평
여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전시 그리고 40대의 시작이 이리 멋질 수 있음에 무한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