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의 글을 읽는 부담감
참 아이러니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자칭 취미로라도 글을 쓴다는 양반이, 호흡이 긴 글을 읽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글이 긴 특집기사나, 장문의 에세이나, 여유가 생겨 소설을 읽을 때, 단락들을 몇 차례 내리읽곤 한다. 분명 무슨 말인지는 알 것도 같은데, 이것을 기반으로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하거나 이 내용을 누군가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자신이 없어져 처음부터 다시 읽곤 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어머니 말씀으로는 밥상머리에서도 못다 읽은 책을 읽었더란다. 초등학교 때는 운문부로 활동하며 광주권 운문 대회에서 상도 몇 차례나 받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커서 무슨 시인이 되는 건 아닌가 하셨더란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글이라곤 참고서에 있는 국어 지문을 읽는 게 문해력 향상을 위한 연습의 전부였다. 심지어 비문학 영역에서도 시간에 쫓기며 정보를 구분하다 보니, 글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기회가 점차 줄어들어갔다.
특히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스마트폰이 출시되었다. 당시 나는 처음에는 폴더폰을 고수했지만, 수능 공부와 학생회장 업무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홧김에 바꿔버렸다. 돌아보니 스마트폰 강의를 통해서 한국사를 공부했고, 단톡방을 활용해서 학생회 업무도 원활하게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능이 끝나고 SNS에 가입하고, 나는 단편화된 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무렵부터 나는 유튜브의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글로 읽는 것보다 동영상을 보는 것이 맥락을 읽기 훨씬 쉬웠다. 그것은 문맥이 아닌 맥락이었다.
최근 들어 종종 무서워지는 건, 유튜브 동영상조차도 느끼기에 길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속도감 있게 편집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콘텐츠에 저절로 손이 올라가곤 한다. 미디어 혹은 콘텐츠 업계에서는 이미 내가 이렇게 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몇 년 전 틱톡이라는 짧은 동영상 플랫폼이 등장했고, 이를 뒤따라 인스타그램에서는 릴스, 유튜브에서는 쇼츠 서비스를 출시했다. 덕분에 내가 콘텐츠를 찾으러 갈 필요 없이, 플랫폼이 알아서 알고리즘의 접시 위에 신선한 콘텐츠들을 누워만 있는 나에게 가져다주고 있다.
바야흐로 콘텐츠의 시대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손동작이 바뀌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책장을 넘기던 손이, 그렇게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틱톡을 넘기고 있다. 이는 횡설수설하게 된 요즘의 나를 암시하는 듯하다. 비교적 깊게 생각해야 하고 복잡해 보이는 것들은 시간도 많으면서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받아들이는 글자들의 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글자들의 수가 줄어들다 보니 생각과 사색의 양도, 머리에 배수구가 생긴 듯 줄어들어갔다. 조금만 들추면 어휘량도 전보다 푹 꺼진 느낌이 들었고, 말에 두서도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사회생활이 어려워진 탓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글의 투입량이 점차 줄어든 까닭일 것이다.
읽는 행위는 참을성, 인내력, 사고력의 정도와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이 쓰기로 표현된다. 최근 긴 글을 보고 있자면 밀물처럼 지루함부터 몰려드는 까닭은, 어쩌면 그동안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독해력을 채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휘발된 독해력은 고스란히 글을 쓸 때의, 그리고 말을 할 때의 나에게 흐리멍덩한 먼지 같은 생각들을 고스란히 안겨준다.
글을 곰곰이 씹어볼 시간이 필요하다. 글을 뚫어져라 보면서 해부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에 뒤쫓기지 말고 머릿속에서 글들을 재조립하고, 행간을 읽어낼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어들을 인스타그램 콘텐츠 스크롤하듯 흘려보내지 않고, 작가가 해당 단어를 쓴 이유와, 단락에서 문장의 위치를 왜 여기에 배치해야만 했는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내 문해력을 시험하는, 몸집과 덩치가 큰 글들을 앞으로는 반갑게 맞이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