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사는 삶에 관하여
허심탄회하면서도 최근 삶의 형태를 꾹꾹 눌러 담은 답이었다. 마치 꽉 찬 쓰레기통에 더 들어갈까 하며 쓰레기를 아득바득 눌러 담은 듯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어'의 뒤에는 '죽는 것이 최선책이고, 사는 것이 차선책이지만, 어쨌든 나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차선책을 택하고 있어'라는 뉘앙스가 향수처럼 배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무의식 중에 두 개의 선을 그어 세 개의 카테고리를 구상했다. '죽고는 못 사는 삶', '그냥저냥 사는 삶', 그리고 '죽지 못해 사는 삶'. 이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삶의 이유'가 가지는 농도를 따른다. 삶의 이유가 짙은가, 그냥저냥인가, 옅은가를 의미한다.
언젠가 인간은 모든 것에 이유를 부여하는 생물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존재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진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지속할 타당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마다 본인 삶의 이유가 가지는 농도를 높이기 위해, 누구는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누구는 그렇게 공부를 하고, 누구는 그렇게 사랑을 마다하지 않았나 보다. '죽어가는 것'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그렇게 '왜 살아야 하는가'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리고 있나 보다.
그 쯤 내 삶이 속한다고 느끼는 '죽지 못해 사는 삶'에는 '삶의 이유가 아예 없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그것까지는 아닐 거라고 결론을 내린다. 삶의 이유가 아예 없다면 죽으면 그만이지만, 현재 '살아가고는 있다는 것'은 삶을 지속하는 이유가 작지만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도 삶의 이유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연말인데 얼굴 한번 보자. 다음 주에 시간 괜찮아?"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아직 2022년 다이어리를 구매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쌀쌀함이 방구석마다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금 삶의 이유가 가지는 농도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연말이다.